어느덧 전시장 일각에서 중국어의 울림은 이채롭지 않게 됐다. 익숙해졌다기보다는, 더 이상 기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화려한 의장으로 치장된 부스, 현란한 LED 조명으로 장식된 제품들이 전시장의 핵심 영역을 점유하고 있다. 한국의 전시산업이 과연 자국 산업의 진흥 플랫폼인지, 아니면 중국 기업의 한국 내 상업적 전초기지로 변모하는 중인지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주최 측은 관용구처럼 되뇐다. "중국 없이는 전시가 작동하지 않는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중국 기업들의 글로벌 진출 통로는 협소해졌고, 한국은 예상치 못한 '우회 항로'로 부상했다. 미국도 접근이 난망하고, 인도마저 교류가 제한되니 한국이 그 공백을 메우게 된 셈이다.
한국의 전시장은 상대적 중립성을 유지하며, 동시에 아시아의 비즈니스 허브라는 지정학적 이점에서 중국 기업에게는 더없이 이상적인 무대다. 그러나 이 무대가 궁극적으로 누구의 서사를 위해 존재하는지, 그 정체성의 경계는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
최근엔 중국 기업들조차 '중국적 색채를 희석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국기를 제거하고, 상징적 색조를 중화시키며, 심지어 한국어를 전면에 내세운다. 주최 측은 이를 문화적 배려라 미화하지만, 실상은 잠재적 반감과 의구심을 회피하려는 전략적 계산이다. 이는 진정한 환대가 아닌 정교한 전략술이다. '중국 기업의 감소'라는 시각적 착시 역시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 실제로는 그들의 존재감은 더욱 증폭됐고, 더 깊숙이 시장을 침투했다. 이제 전시산업은 단순한 상업적 이벤트를 넘어, 산업 주권을 둘러싼 무언의 경합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문제의 양상은 여기서 종결되지 않는다. 중국 기업은 단순히 참여에 그치지 않는다. 가격 우위를 전략적 무기로 삼아 시장을 잠식한다. 한국 기업들은 침묵 속의 불만을 토로한다. 글로벌 전시회와는 상반되게, 자국 시장에서조차 자국 기업이 주변화되는 기이한 풍경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주최 측의 관점은 '전시 면적의 점유율만 충족되면 된다'는 표면적 성과주의에 경도돼 있다. 마치 객석만 채워진다면 공연의 예술성은 부차적이라는 논리와 같다.
한국 기업의 누적된 불만이 수면 위로 부상하자, 이제는 부스 배치의 지형학까지 조정하며 '중국의 가시적 존재감'을 희석시키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누군가는 은밀한 미소를 짓고, 누군가는 침묵 속에 퇴장한다. 과연 이러한 구도를 상생의 생태계라 규정할 수 있을까.
전시산업은 산업 생태계의 압축된 미시우주다. 시장 논리와 외교적 역학, 기술 헤게모니, 문화적 정체성이 한 공간에 응축된다. 중국을 배타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참여의 질적 방향성과 규범적 기준은 명확히 설정돼야 한다. 경제적 이익이 창출된다면, 그 수혜자는 누구인가? 일회성 참가를 넘어, 기술 유출이나 불공정 경쟁을 초래하지는 않는가? 한국 기업을 위한 제도적 안전장치는 구축돼 있는가? '중국과의 균형적 관계 유지'라는 외교적 수사만으로는 산업의 근간을 보전할 수 없다.
현 추세를 방임한다면 전시의 본질은 퇴색한다. 중국 기업이 기술적 우위를 과시하고, 한국 기업은 방관자로 전락하는 구조적 왜곡이 심화된다. 더욱이 일부 중국 업체들은 전시 종료 이전에 무단으로 부스를 철수하는 사례도 빈번하다고 한다. 명함만을 배포하고 조기 퇴장하는 이들에게 어떠한 '성실한 참여 의식'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제는 그 참여의 형식적 외관뿐 아니라 실질적 내용을 엄밀히 검증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의 전시 공간에는 개방적 환대의 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환대가 필수적 경계의식을 희석시켜서는 안 된다. 진정한 환대란 기회의 문을 여는 것이지, 산업의 근간을 양도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 전시장에는 무분별한 환대만 존재하고, 명확한 기준은 부재하다. 환대와 경계 사이의 미묘한 균형점에서, 우리는 산업의 존엄과 자주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지금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양적 팽창이 아니라, 질적 방향성이다. 그 방향성을 정립할 궁극적 책무는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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