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라는 거대한 사회적 재난 앞에서 피해자 구제 방식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기존 특별법이 제공하는 공공매입이나 금융 지원의 한계를 넘어, 피해자들이 직접 뭉쳐 자산과 주거를 지키는 ‘전세피해 협동조합’이 새로운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핵심은 피해자가 단순 수혜자가 아닌 ‘회복의 주체’가 되고, 공공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경기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전세피해 해결을 위한 협동조합 모델의 성과 및 개선방안’ 보고서는 이 모델을 공공 지원 체계의 핵심 축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제언을 담고 있다.
왜 ‘협동조합’인가: 청년층 ‘주거 사다리’ 붕괴 막을 현실적 대안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2025년 10월 기준, 전세사기 피해자 중 75.7%가 20~30대 청년층이다. 이들에게 전세보증금은 전 재산이자 미래를 위한 종잣돈이다. 기존의 공공매입 임대 방식은 당장의 주거는 해결해 줄지 몰라도, 청약 저축 납입 인정이나 생애 최초 주택 구입 혜택 등 미래를 위한 ‘무주택 지위’와 충돌하는 딜레마가 있었다.
협동조합 모델은 이 틈새를 파고든다. 피해자들이 조합을 결성해 피해주택을 인수하거나 관리권을 확보하고, 이를 반전세 등으로 전환해 운영 수익으로 금융 비용을 감당하는 구조다. 이는 소유권은 조합이 갖되 개인은 무주택 자격을 유지할 수 있게 하며, 흩어졌던 피해자들의 협상력을 극대화해 자산 회복의 가능성을 높인다. 경기도의 ‘탄탄주택협동조합’ 사례는 피해자들이 공동체로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실질적인 가능성을 증명했다.
핵심 선결 과제: 고금리 족쇄 풀 ‘공공의 신용 보강’
문제는 ‘돈’이다. 연구보고서는 협동조합의 성공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로 초기 금융 비용을 지목했다. 현재 피해자들은 협동조합 설립과 주택 인수를 위해 고금리 민간 대출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다.
경기연구원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공의 신용 보강’을 주문했다. 협동조합이 조달한 고금리 대출을 주택도시기금 등 저리 공공기금으로 대환해주고, 이차보전과 보증료 지원을 통해 금융 리스크를 공공이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이라는 엔진이 돌아가도록 공공이 ‘저금리 연료’를 공급해야 한다는 논리다.
또한, ‘전세사기피해자법’에 ‘협동조합 기반 피해회복 모델’을 명시해 공공지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법적 지위를 인정받아야만 세제 혜택, 컨설팅, 보조금 등 체계적인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해법: 중앙·지방·민간 잇는 ‘다층적 거버넌스’ 구축
보고서는 협동조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별 피해자들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중앙정부, 광역·기초 지자체, 그리고 사회적 경제 주체들이 역할을 분담하는 ‘다층적 거버넌스’가 필수적이다.
기초지자체는 현장에서 흩어진 피해자들을 조직화하고 공간을 제공하며, 광역지자체(경기도)는 표준 정관과 운영 매뉴얼을 보급하고 전문가 자문 네트워크를 연결한다. 중앙정부와 LH·HUG는 대규모 자산 매입과 리츠(REITs) 구성을 통해 자본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대규모 피해 단지의 경우, 공공주도 리츠에 피해자 협동조합이 주주로 참여하는 ‘복층 협력모델’이 제시됐다. 이는 공공의 자금력과 자산 관리 전문성을 활용하면서도, 피해자들이 쫓겨나지 않고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진일보한 모델로 평가받는다.
전망: ‘사후 구제’를 넘어 ‘시장 체질 개선’으로
이번 연구는 협동조합 모델이 사후 약방문에 그치지 않고, 전세 시장의 체질을 바꾸는 예방책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고위험 지역을 중심으로 임차인들이 사전에 ‘예방형 주택협동조합’을 결성해 집단적 협상력을 갖춘다면, 정보 비대칭으로 인한 사기 피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박기덕 경기연구원 연구위원은 “전세사기 피해는 단기간에 끝나는 문제가 아니며, 협동조합 모델은 피해자가 수동적 지원 대상에서 회복의 주체로 거듭나는 전환점”이라며 “공공지원이 결합할 때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c)산업종합저널.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