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배너

[데스크칼럼] 재생 플라스틱, ‘채우는 숫자’에서 ‘증명하는 기준’의 시대로

EU발 재활용 산정 규칙 개편과 한국의 과제… 제3자 검증 법제화해야 돼

유럽은 숫자를 서두에 내세우지 않는다. 무엇을 셀 것인지부터 다시 묻는다. 이 질문 하나가 지금 재생 플라스틱 정책의 방향을 갈라놓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를 따라가다 보면 익숙한 불안이 스며든다. 우리는 이미 목표를 정했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정작 그 목표를 지탱할 기준은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반복된다.

EU는 '1회용 플라스틱 지침'을 개편하며 화학적 재활용과 질량수지를 제도 안으로 편입했다. 단순한 인정 확대가 아니다. 연료로 사용된 물량은 제외하고 국제표준에 따른 제3자 검증을 의무화했다.

재활용 범위를 넓히는 대신 산정과 검증의 규칙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은 셈이다. 재생원료 확대라는 목표와 환경적 신뢰성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물론 화학적 재활용을 둘러싼 논쟁이 EU 내부에서도 이어지고 있지만, 적어도 제도 설계의 중심이 ‘무엇을 어떻게 셀 것인가’로 이동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데스크칼럼] 재생 플라스틱, ‘채우는 숫자’에서 ‘증명하는 기준’의 시대로 - 산업종합저널 에너지
[그래픽 = AI 활용]

이 지점에서 한국의 상황은 아쉬움을 남긴다. 우리는 “2030년 30%”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방향은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그 수치를 구성하는 기준을 들여다보면 빈틈이 적지 않다. 페트병 몸체 외에 캡과 라벨을 포함할지 여부가 불명확하고, 화학적 재활용과 질량수지의 인정 기준도 정리되지 않았다. 인정 범위뿐 아니라 계산 지점과 손실 처리 방식 역시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다. 검증 또한 공급망 전반을 아우르는 독립적 체계라기보다 사업자 자료와 사후 확인에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구조에서는 같은 목표를 두고도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기업마다 해석이 달라질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목표 수치는 존재하지만, 그 수치를 둘러싼 신뢰는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입법조사처가 지적하듯, 제도의 성패는 목표치 자체보다 산정기준과 검증체계에 달려 있다.

문제는 이 공백이 국내 정책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EU의 재생원료 기준은 SUPD를 넘어 포장재 규정, 탄소국경조정, 공급망 실사 제도와 연결된다. 재생원료는 환경 정책의 범주를 넘어 시장 접근의 조건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OECD 회원국이라는 점은 긍정적 요소지만, 자동적인 인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추적 가능성과 환경적 동등성을 입증하는 체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고서의 분석이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제시한 해법은 방향이 분명하다. 재생원료의 범위를 명확히 법제화하고, 화학적 재활용과 질량수지는 물질 재활용 우선 원칙과 제3자 검증 등을 조건으로 제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수입 재생원료에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고, 분리배출과 병-병 재활용 체계를 유지하면서 평가와 환류를 결합하는 운영이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숫자를 채우는 정책에서 벗어나, 숫자를 구성하는 기준을 먼저 세우라는 주문이다.

재생 플라스틱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원유 가격과 공급망 불안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그것은 산업과 민생을 지탱하는 자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정책의 무게중심은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얼마나 쓰느냐보다, 무엇을 어떻게 인정하느냐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EU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제도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한국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목표를 높이는 일보다 기준을 정교하게 만드는 일이 더 오래 걸린다. 그러나 그 차이가 결국 시장의 신뢰와 접근성을 가른다. 숫자는 결과다. 제도는 그 숫자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목표의 상향이 아니라, 셈법의 정교화다.

0 / 1000


많이 본 뉴스

[데스크칼럼] 폭염 안전법과 쿠팡 파업 예고에 드러난 노동 현실

연일 계속되는 폭염 속, 산업안전보건기준이 바뀌었다. 이달 17일부터는 체감온도 33도 이상일 때 ‘2시간마다 20분 휴식’이 법으로 명시됐다. 고용노동부는 ‘폭염안전 5대 수칙’을 발표하며 강제성까지 강조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는 목소리가 잇따른다. 제도가 마련돼도 그 제도

[데스크칼럼] 확장과 현실 사이 "킨텍스가 잃어가는 것들…"

국내 최대 전시 인프라인 킨텍스(KINTEX)가 제3전시장 건립이라는 대형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러나 외연 확장의 이면에 드러나는 운영 현실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선 신뢰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미래를 위한 투자와 현재의 기본 요건 사이에서, 킨텍스는 지금 균형점을 다시 찾아야 할 시점

[데스크칼럼] "보상해 드립니다"… 쿠팡 유출보다 무서운 '2차 가해'

"고객님, 쿠팡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피해 보상을 정부 지침에 따라 진행해 주세요." 이 문구 앞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흔들린다. 낯설지 않은 브랜드, 실제 뉴스로 접한 유출 사고, 익숙한 공공기관의 이름. 마치 현실과 가짜의 경계가 사라진 듯 정교하게 짜인 메시지 속에서 사람들은 의심보다

[데스크칼럼] "팹리스와 파운드리, 고립을 끝낼 때다"

한국 시스템반도체 산업이 다시 한 번 전환점을 맞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대학교 반도체공동연구소에서 열린 ‘팹리스-파운드리 상생협의회’는 단순한 업계 간 만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글로벌 기술 경쟁이 격화되고 공급망 불확실성이 높아진 지금, 이 자리는 국내 반도체 생태계가 구조적 한

[데스크칼럼] “일하면 연금 깎입니다”… 누가 고령자에게 죄를 묻는가

13만 7,061명. 지난해 ‘일을 했다는 이유로’ 국민연금이 감액된 사람의 수다. 총 감액액은 2,430억 원. 4년 새 43%나 늘었다. 특히 월 50만 원 이상 깎인 사람은 2만 6,000명이 넘는다. 이들은 단지 은퇴 후에도 일했다는 이유로 연금을 줄여 받는다. 무슨 죄를 지은 걸까? 국민연금법




산업전시회 일정


미리가보는 전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