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쓴 확장현실(XR·Extended Reality) 기기 속 화면이 실제 풍경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초고화질을 내려면, 손톱만 한 영역 안에 수십만 개의 발광소자를 빼곡하게 심어야 한다. 눈앞 1㎝ 거리에서도 픽셀이 보이지 않는 2500PPI(Pixels Per Inch)급 해상도를 구현하려면, 머리카락 굵기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초미세 소자들을 실리콘 기판 위에 오차 없이 붙이는 기술이 필수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이러한 요구를 겨냥한 초정밀 레이저 접합 공정을 선보이며 AI·XR 시대 디스플레이 판도를 노리고 나섰다.

차세대 AI·XR 디스플레이용 초미세 접합 기술 개발에 성공한 ETRI 연구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최근 초고해상도 LEDOS(Light Emitting Diode on Silicon) 디스플레이 구현을 뒷받침하는 레이저 기반 초미세 접합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7일 밝혔다. 연구진이 발표한 결과는 세계 최대 디스플레이 학회인 ‘SID 디스플레이 위크 2026(SID Display Week 2026)’에서 공개됐고, 마이크로 LED 부문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People's Choice Award)’를 받으며 현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HBM4보다 촘촘한 접합…10㎛ 피치·92만 개 범프
이번에 확보한 공정의 핵심은 10㎛(마이크로미터)급 피치(간격)에서 약 92만 개에 이르는 범프를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초고밀도 접합 능력이다. 이는 AI 가속기·고성능 GPU에 쓰이는 대표적 첨단 메모리 패키지 HBM4(고대역폭메모리4)의 20㎛급 피치와 20만 개 내외 범프 수준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초미세 범프를 다루는 기존 공정은 고온 처리 과정에서 기판이 휘거나 미세한 오염물이 생기기 쉬워,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수율 관리가 어려워지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수십만 개 범프를 한 번에 붙이는 과정에서 위치가 조금만 어긋나도 대량 불량으로 이어지는 탓에, 실제 양산 공정에서 적용하기 쉽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연구진은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독자 개발한 신소재 ‘사이트랩(SITRAB)’과 레이저 공정을 결합하는 방식을 택했다. SITRAB은 레이저를 조사할 때 공정 주변에 흄(Fume) 형태의 미세 오염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성질을 지니고 있어, 접합부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 또 상온 상태에서 공정이 이뤄지도록 설계돼 열에 따른 기판 뒤틀림을 크게 줄이고, 칩 정렬이 어긋나는 현상도 함께 완화했다.
이 같은 기반 위에 연구진은 실리콘 CMOS(상보형 금속 산화물 반도체) 회로 위에 질화갈륨(GaN) 계열 마이크로 LED 칩을 직접 올려 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2500PPI급 해상도를 갖춘 LEDOS 디스플레이 시제품을 구현하며, 차세대 XR 기기에 요구되는 초고해상도 패널의 핵심 공정을 사실상 손에 넣었다는 평가다.
XR용 초소형 디스플레이…밝기·전력·해상도 한 번에
LEDOS는 실리콘 기판과 마이크로 LED를 바로 결합하는 방식의 초소형 디스플레이 기술이다. 눈과의 거리가 짧은 AR(증강현실) 글래스와 VR(가상현실) 헤드셋에서는 픽셀 간 간격을 극단적으로 줄이면서도 충분한 밝기와 낮은 전력 소모를 함께 만족해야 하는데, LEDOS는 이 세 가지 요구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세대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다.
밝은 야외 환경에서 콘텐츠를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배터리 부담을 키우지 않는 것도 LEDOS의 장점으로 꼽힌다. AI·XR 기기가 눈·제스처 인식, 실시간 3D 렌더링 등 고부하 연산을 수행하는 만큼, 디스플레이 구동 전력을 줄이는 기술은 곧 사용 시간과 휴대성 경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실험실 넘어 공장으로…소부장과 함께 가는 상용화
ETRI의 성과는 연구실에서 끝나는 단발성 시연이 아니라, 국내 생산 인프라와 연계된 상용화 단계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SITRAB 소재 기술은 이미 국내 소재 기업으로 기술 이전이 완료됐고, 관련 레이저 접합 장비는 국내 반도체 후공정 전문업체(OSAT)의 양산 라인에 투입돼 실제 생산 환경에서 검증을 진행 중이다.
고가의 해외 패키징 공정에 의존하지 않고도, 국내에서 개발한 소재와 공정만으로 초고밀도 접합을 구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에는 적잖은 파급 효과가 예상된다. XR 디스플레이를 넘어, 이종 칩을 촘촘히 묶는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기술에도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주지호 ETRI 저탄소집적기술창의연구실장은 “AI·XR 시대에는 디스플레이 해상도 수치만 높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수준을 실제 공정에서 구현해낼 수 있는 접합 기술이 핵심 경쟁력”이라며 “SITRAB 기반 공정은 XR 기기용 패널은 물론, 서로 다른 반도체를 한데 묶는 고밀도 이종집적 플랫폼으로도 확장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최광성 ETRI 창의원천연구본부장은 “HBM4급 메모리 패키지보다 더 촘촘한 접합을 국내 기술만으로 달성했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라며 “AR 글래스·VR 헤드셋 같은 차세대 XR 기기뿐 아니라 국방·의료용 초소형 디스플레이와 첨단 패키징 분야까지 활용 범위를 넓혀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연구진은 앞으로 RGB 풀컬러 구현, 구동 전력 최소화, 대면적 패널 적용 등 후속 기술을 단계적으로 확보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동시에 국내 소재·장비·패키징 기업과의 공동 개발을 확대해, 차세대 디스플레이와 고집적 패키징 분야에서 국내 기업들이 초기에 시장을 선점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