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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이지 않고 원유 먼저 거른다…KAIST, ‘분자 정유’ 분리막 개발

값싼 PAN 막으로 상온서 경질 성분 농축…증류탑 앞단 적용 땐 에너지 31.6%·탄소 37.6% 절감 전망

시커먼 원유가 얇은 막을 지나자 투명한 황색 액체로 바뀌었다. 350℃ 이상으로 끓여 성분을 나누던 정유 공정에서 가장 에너지를 많이 쓰는 단계를 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제시됐다. 원유 전체를 곧바로 증류탑에 넣는 대신, 상온에서 나프타·등유 같은 가벼운 성분을 먼저 걸러내는 방식이다. 정유 산업의 100년 문법이었던 “끓여서 나눈다”는 상식에 “먼저 걸러서 덜 끓인다”는 선택지가 생긴 셈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KAIST는 고동연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 연구팀이 값싼 고분자 막을 이용해 원유 속 경질 성분을 상온에서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됐다. 이 기술은 기존 증류탑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다. 증류탑 앞단에 전처리 모듈을 붙여 원유를 1차로 나누고, 남은 성분만 기존 설비에서 처리하는 하이브리드 공정에 가깝다.

끓이지 않고 원유 먼저 거른다…KAIST, ‘분자 정유’ 분리막 개발 - 산업종합저널 에너지
박시정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초연구진흥과장(e-브리핑 영상 캡처)

원전 130기분 에너지 쓰는 증류 공정
박시정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초연구진흥과장은 브리핑에서 정유 공정의 에너지 부담을 먼저 짚었다. 전 세계 정유 공장이 원유를 끓이고 식히는 데 쓰는 에너지는 연간 1,100TWh에 이른다. 1GW급 대형 원전 약 130기가 1년 내내 생산해야 하는 전력량과 맞먹는 규모다. 정유 공정이 기후위기 시대에도 쉽게 바뀌지 못한 이유는 분명하다. 원유는 수천 가지 탄화수소가 뒤섞인 복잡한 혼합물이고, 지금까지 산업 현장은 이 복잡성을 끓는점 차이로 해결해 왔다.

고 교수팀은 해수담수화에서 일어난 전환에 주목했다. 물을 끓여 담수를 얻던 방식이 막으로 거르는 방식으로 바뀐 것처럼, 원유 분리도 열이 아니라 여과로 일부 대체할 수 있는지 실험했다. 고 교수는 브리핑에서 “끓이지 않고 원유를 나누겠다는 발상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원유 전체를 한 번에 완벽히 나누는 것이 아니라, 증류 전에 가벼운 성분을 덜어내 증류탑의 부담을 낮추는 데 있다.

값싼 지지층이 스스로 만든 2nm 통로
흥미로운 대목은 막의 구조다. 분리막 연구에서는 보통 분자를 정밀하게 거르기 위해 얇은 선택층을 코팅한다. 연구팀은 반대로 갔다. 아무것도 입히지 않은 다공성 PAN, 즉 폴리아크릴로니트릴 지지층을 그대로 썼다. 비싼 기능층을 얹기보다 값싼 받침막에 실제 원유를 흘려보낸 것이다.

끓이지 않고 원유 먼저 거른다…KAIST, ‘분자 정유’ 분리막 개발 - 산업종합저널 에너지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고동연 교수(e-브리핑 영상 캡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원유 속 선형 탄화수소 계열 성분이 막 내부 기공 벽에 달라붙으며 통로를 좁혔다. 마치 양초가 굳듯 무거운 성분이 기공 안쪽에 축적됐지만, 구멍을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기공은 2nm 이하의 미세 통로로 줄어들었고, 그 사이로 나프타와 등유 같은 경질 성분이 농축돼 빠져나갔다. 연구진은 이 현상을 ‘자기제한적 기공 수축’으로 설명했다.

기공이 끝까지 막히지 않는 이유는 깁스-톰슨 효과와 관련이 있다. 좁은 공간에 갇힌 물질은 녹는점이 달라진다. 통로가 일정 크기 이하로 줄어들면 고체 성장이 더 진행되지 않고 멈춘다. 그 결과 막힘이 아니라 선택적 이동 경로가 만들어진다. 연구팀은 이 구조 덕분에 기존 고분자 분리막보다 빠른 투과 성능을 얻었다. 기존 벤치마크보다 23배 이상 높은 투과 성능과 4주 수준의 안정성도 제시했다.

증류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덜 끓이게 하는 기술
산업 적용 방식은 비교적 현실적이다. 정유 공장 전체를 새로 짓는 대신 기존 증류탑 앞단에 모듈을 추가하는 방식이다. 상온에서 나프타·등유 등 가벼운 성분을 먼저 걸러내고, 남은 무거운 성분만 증류탑으로 보내는 구조다. 설비가 처리해야 할 양과 열 부담이 함께 줄어든다.

공정 모사 결과도 이 방향을 뒷받침한다. 연구진은 전처리를 기존 증류 공정에 결합할 경우 에너지 사용량을 31.6%, 냉각수 사용량을 20.7%,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37.6%, 운영비를 36%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설비 전체를 갈아엎는 방식이 아니라 배관 사이에 필터 모듈을 추가하는 접근이라는 점도 산업계가 주목할 대목이다.

경제성도 강점으로 제시됐다. PAN은 비교적 값싼 범용 고분자 소재다. 고가의 선택층을 정교하게 코팅한 막보다 제조 부담이 낮다. 공정 경제성 분석에서는 투자비 회수기간을 3~5년으로 가정해도 경제성이 있다는 설명이 나왔다. 다만 이는 공정 모사와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한 전망이다. 실제 정유 공장 적용을 위해서는 대면적 모듈 제작, 장기 운전 안정성, 다양한 산지의 원유에 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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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온에서 가압한 원유를 다공성 PAN 분리막에 흘려보내 휘발유·나프타·등유 등 가벼운 성분만 걸러내는 공정 모식도<그림제공=KAIST 고동연 교수>

폐플라스틱·배터리·의약품 공정으로 확장 가능성
활용처는 원유 분별에 그치지 않는다.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정제, 배터리 용매 회수, 의약품 정제 등 복잡한 혼합물을 낮은 에너지로 나눠야 하는 공정에 응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연구진은 PAN 외에도 폴리이미드와 PVDF 같은 범용 소재에서 유사한 메커니즘이 작동할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

고 교수는 이 연구를 “가장 단순한 막으로 가장 복잡한 혼합물을 건드린 사례”로 설명했다. 이 말은 성과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연구팀이 만든 것은 정유 공장의 내일 아침을 당장 바꿀 완성품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 100년 동안 정유 공정을 지배해온 고온 증류 중심 사고에 균열을 낸 것은 분명하다. 정유 산업의 탈탄소는 전기차나 재생에너지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플라스틱과 섬유, 연료와 화학제품의 출발점이 원유라는 점을 생각하면, 덜 끓이는 기술은 산업 탈탄소의 조용하지만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의미는 “원유를 끓이지 않아도 된다”는 단순한 구호에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원유를 처음부터 다 끓일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실험으로 보여준 데 있다. 까만 원유가 얇은 막을 지나 연한 황색 액체로 바뀌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정유 산업의 에너지 부담을 줄이는 길이 거대한 증류탑 안이 아니라, 그 앞에 놓인 작은 전처리 장치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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