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제도도 현장을 앞질러 달리면 벌이 된다. 지속가능성 공시를 둘러싼 논란이 딱 그렇다. 기업이 기후와 노동과 공급망 리스크를 시장 앞에 설명해야 한다는 원칙은 더는 낯설지 않다. 투자자는 기업의 재무제표만 보지 않는다. 그 기업이 탄소 비용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본다. 협력사 노동 환경이 어느 날 평판 리스크로 터질 가능성도 따진다. ESG 공시는 이제 착한 기업을 홍보하는 장식물이 아니라 기업의 체력을 가늠하는 숫자가 됐다.
그래서 산업계의 반발을 단순한 엄살로만 볼 일은 아니다. 경제6단체가 공동성명까지 낸 이유도 공시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기보다 순서를 다시 보자는 데 가깝다. 경제계는 성명에서 지속가능성 공시 도입의 필요성과 방향성에는 공감한다고 전제했다. 문제는 그 공시를 곧바로 사업보고서에 넣는 법정공시로 끌고 갈 수 있느냐다. 사업보고서는 무겁다. 한 줄의 숫자와 문장에도 법적 책임이 붙는다. 기업 처지에서는 홍보용 보고서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니다. 투자자와 감독당국과 법원이 들여다볼 문서를 쓰는 일이다.
제조업 현장으로 내려가면 이 부담은 더 선명해진다. 대기업 한 곳이 온실가스 배출량과 공급망 리스크를 공시하려면 본사 자료만 모아서는 부족하다.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사에 에너지 사용량을 묻고 원재료 조달 과정을 확인해야 한다. 자동차 회사는 수많은 부품업체의 배출 정보를 맞춰야 한다. 배터리 기업은 광물 조달 과정의 환경과 인권 문제까지 챙겨야 한다. 조선과 중공업처럼 협력망이 두껍고 공정이 긴 업종은 기준을 통일하는 일부터 만만치 않다. 상장사 몇 곳에 부과한 의무가 공급망 아래쪽 중소기업의 책상 위로 내려앉는 구조다.
그 책상 위에는 이미 많은 서류가 쌓여 있다. 중소 협력사에는 ESG 전담 인력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계측 장비와 데이터 관리 체계도 여유롭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외부 검증 비용은 매출과 인건비 사이에서 늘 부담스러운 선택지다. 어느 날 대기업 원청이 자료 제출 양식을 보내오면 담당자는 매출과 납품 일정 사이에서 새 파일을 또 열어야 한다. 지속가능성을 증명하라는 요구가 정작 작은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갉아먹는 장면이다. 제도가 겨냥한 곳은 대기업인데 압력은 약한 고리부터 느낀다.
예측정보의 문제도 가볍지 않다. 지속가능성 공시는 과거의 확정된 숫자만 쓰는 작업이 아니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전환 계획, 기후 시나리오에 따른 재무 영향, 공급망 리스크 관리 수준은 미래를 향한 추정에 가깝다. 미래는 늘 빗나간다. 원자재 가격이 바뀌고 기술 속도가 달라지고 규제 환경이 흔들린다. 기업이 당시 기준에 따라 성실하게 예측했더라도 몇 년 뒤 결과가 달라지면 허위공시 논란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법정공시의 이름으로 미래를 너무 단단히 못 박으면 기업은 솔직한 전망보다 안전한 침묵을 택할 가능성이 커진다.
물론 반대편의 논리도 분명하다. 자율공시만으로는 그린워싱을 막기 어렵다. 듣기 좋은 말만 담은 지속가능성 보고서가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는 없다. EU와 주요국이 공시 제도화를 서두르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만 느슨한 체계에 머물 수는 없다. 투자자 보호를 생각해도 공시의 책임성은 필요하다. 지속가능성 정보가 기업 이미지 관리의 영역에 남아 있으면 시장은 필요한 위험 신호를 제때 읽지 못한다.
그렇다면 쟁점은 공시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가 아니다. 어떤 속도로 어떤 안전판을 갖추고 갈 것인지다. 법정공시를 향한 길은 열어야 한다. 다만 그 길 위에 거래소 자율공시와 시범사업이라는 완충 구간을 둬야 한다. 기업이 데이터를 모으고 내부통제 체계를 만들고 검증기관이 경험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 예측과 추정 정보에는 성실 공시를 전제로 한 면책 기준을 더 분명히 세워야 한다. 업종별 특성도 반영해야 한다. 반도체와 자동차와 배터리와 조선에 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공정한 기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딘 기준이 된다.
지속가능성 공시는 기업을 바꾸기 위한 제도다. 그러나 제도 역시 지속가능해야 한다. 숫자를 요구하기 전에 숫자를 만들 수 있는 현장을 봐야 한다. 책임을 묻기 전에 책임질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방향이 옳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속도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좋은 제도는 가장 빨리 도착하는 제도가 아니라 오래 버티며 시장의 신뢰를 쌓는 제도다. 지금 필요한 것은 후퇴가 아니다. 숨 고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