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주의의 몰락이냐, 협상의 진화냐."
올해 세계 무역은 더 이상 규범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자리에는 ‘양자적 거래’와 ‘힘의 통상’이 공백을 채우고 있다. 미국의 ‘상호관세’ 정책이 촉발한 글로벌 통상질서의 구조적 변화다.
국회미래연구원이 발간한 '상호관세 이후 글로벌 통상질서의 변화와 시사점' 보고서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이 처한 냉혹한 현실을 정밀하게 추적했다. 핵심은 미국의 관세 전략이 규칙 기반의 통상 환경을 무너뜨리고, 최혜국대우(MFN) 원칙을 무력화했다는 데 있다.
美 '무차별 관세'… 법적 근거는 'IEEPA·무역확장법'
미국은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과 ‘무역확장법 제232조’를 근거로 무역흑자국에는 15% 이상의 상호관세를, 무역적자국에는 10%의 보편관세를 적용했다. 자동차·철강 등 전략 품목에는 25~50%에 달하는 추가 관세를 매겼다.
이 조치는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동맹국에도 예외가 없었다. 과거에는 한 국가에 부여한 혜택이 제3국에도 자동 적용됐지만, 트럼프 행정부 정책 하에서는 ‘미국과의 개별 협상’만이 유일한 해법이 됐다. 조건은 철저히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입장에 따라 국가별로 달랐다.
4천500억 달러의 청구서… "권리 아닌 거래된 특혜"
결국 한국, 일본, 유럽연합(EU)은 개별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한국은 15% 수준의 상호관세 적용을 받아내며 급한 불을 껐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1천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구매와 3천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라는 고강도 양보가 조건이었다.
보고서는 한국이 이 합의로 자동차, 반도체, 의약품 등 전략 품목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일부 회복했지만, 이는 보편적 권리가 아닌 ‘거래를 통해 확보한 특혜’라고 규정했다. 또한 장기적으로 산업 공동화 위험과 수출 구조 편중, 공급망 취약성을 동시에 안게 됐다고 지적했다.
통상은 더 이상 통상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의 관세 정책은 단순한 무역을 넘어 안보·정치·외교와 연계되며 지정학적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보고서는 아세안 협상에 포함된 ‘우회수출 방지 조항’은 중국을 겨냥한 조치이며, 인도와 브라질에 부과된 50%의 징벌적 관세는 각각 러시아산 원유 수입과 국내 정치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통상이 안보 논리와 결합된 것이다.
해법은 '소다자 협력'과 '공급망 다변화'
이에 따라 보고서는 대응 전략으로 '소다자 협력'과 '공급망 다변화'를 제시했다. 우선 한국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가입해 EU 등과 함께 미국에 대등한 협상력을 가진 블록을 형성해야 한다고 봤다. CPTPP는 디지털 무역, 친환경 통상 등 신흥 규범을 선도하고 있어 한국이 규범 설정자 역할을 확보할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디리스킹(de-risking) 대상을 중국뿐 아니라 관세 리스크가 상존하는 미국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세안(ASEAN) 국가들과 협력 확대, 생산기지 분산, 인프라 투자 및 ODA(공적개발원조) 확대를 통한 공급망 유연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특히 CPTPP 내 '원산지 누적 규정'은 회원국 간 부품 조달을 가능하게 해 실질적인 공급망 다변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보고서는 무너진 규칙의 세계에서 새 질서를 세우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남는 선택지는 언제나 '조건부 수용'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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