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배너

[산업 톺아보기] “사장님, 다른 데 갈래요”… 중소기업이 흔들리고 있다

‘CQ 점수’보다 무서운 건 ‘3개월 탈출 선언’

“사장님, 저 다른 데 갈래요.”

통역기를 거치지 않은 한국어였지만, 그 짧은 말은 공장장 이 모 씨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4개월 전 어렵게 데려온 외국인 근로자가 퇴사를 요청한 순간이었다. 아직 기술도 채 배우지 못한 채, 그의 시간표엔 이탈만이 남았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 근로자의 사업장 변경 요구를 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74.5%에 달한다. 입국 후 불과 ‘3개월 이내’ 이직을 요구받은 기업이 전체의 34.6%. 표본은 310개사에 불과했지만, 그 수치는 현실의 단면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통계보다 날 선 건 현장의 체감이다. 숙련을 쌓기 전에 떠나는 근로자들, 채워지지 않는 잔업 라인, 기숙사를 비우고 사라진 이들의 침묵까지. 가장 아픈 건, 이탈률이 더 높은 곳이 수도권이 아닌 지방이라는 점이다. 지방 제조업은 본래부터 외국인 노동자 의존도가 높았다. 그런데도 이직 요청은 비수도권에서 8.3%포인트나 더 많았다.

정부는 외국인력의 ‘자유로운 이직’을 고려 중이다. 이른바 고용허가제 개편이다.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앞세운 조치지만, 산업 현장에선 “준비되지 않은 자유는 무책임”이라 반발이 거세다. 설문에서도 중소기업의 절반은 ‘현행 유지’를, 31.6%는 ‘2년 제한 후 허용’을 요구했다. 한 기업 관계자는 “3년의 숙련도 쌓기 전에 이직을 허용하면, 우리는 단순히 외국인들의 ‘첫 직장 트레이닝 센터’가 될 것”이라 했다.
[산업 톺아보기] “사장님, 다른 데 갈래요”… 중소기업이 흔들리고 있다 - 산업종합저널 동향
이해를 돕기 위한 생성형 AI 이미지

‘사업장 변경 완화’는 곧 인력난의 재점화다. 기업들은 가장 큰 우려로 ‘영세 중소기업의 인력난 심화’(61.3%)를 꼽았고, 이어 ‘생산성 하락’(54.2%), ‘직무교육 손실’(43.5%)이 뒤를 이었다. 이들의 말 속에는 두려움보다 절박함이 더 짙다. 단순한 노동력의 손실이 아니라, 생산 기반이 붕괴되는 위기감이다.

정책 당국이 이런 반응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완화를 전제로 한 ‘보완장치’가 함께 논의된다. 이직자가 발생한 사업장에 외국인력 우선배정(60.6%), 귀책 사유가 없는 기업에는 패널티 면제(59.5%), 기숙사 비용 세액감면(45.3%)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보완책이 뿌리 깊은 불균형을 막을 수 있을까. 한국의 외국인 고용 시스템은 산업단지의 골목골목에 스며들어 있다.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은 이제 지방 제조업의 일상어다. 그곳에선 사람을 붙잡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게,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다.

기술을 배우기도 전에 떠나는 노동자, 그리고 숙련자를 키우기도 전에 떠밀리는 사장들. 고용허가제는 그 둘의 사이에 선 유일한 장치였다. 그것이 무너질 경우,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신뢰의 균열이 생긴다.

우리는 지금 ‘변화의 필요’와 ‘지속가능성의 조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외국인근로자의 권익과 기업의 생존, 그 둘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의 문제다.
정책은 이탈을 부추기는 탈출구가 아니라, 남아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설계도를 그려야 한다.

오늘도 작은 공장의 하루는 여느 때처럼 시작됐다. 다만 ‘그’가 오늘도 출근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기계는 멈추지 않지만, 사람의 시간은 언제든 끝날 수 있다.
‘CQ 점수’보다 무서운 건, ‘3개월 탈출 선언’이라는 현실의 한 줄 요약이다.
김보영 기자
cchby@industryjournal.co.kr


0 / 1000


많이 본 뉴스

[기획] ‘신중 속 선택적 확장’…2026년 기업 투자·경영 전략의 두 얼굴

2026년을 맞이한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고환율, 고금리, 글로벌 통상 리스크 등 대외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기업들은 ‘확장’보다는 ‘유지’, ‘보수’보다는 ‘선택적 전진’을 택했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움츠러든 것은 아니다. 산업별·기업규모별로 온도차가

[이슈 기획] AI가 흔드는 반도체 제조, 누가 살아남을까

AI 시대, 미세공정만으론 버티기 어려운 구도 AI 수요 확대는 반도체 제조의 설계와 생산 방식을 동시에 바꾸고 있다. 201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전공정과 후공정이 비교적 분리된 분업 구조를 유지했지만, 이제는 칩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공정 전 단계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데이터는 연료인가, 도둑질인가"… AI 저작권, '공정 이용'의 딜레마

AI 학습에 사용되는 데이터의 저작권 문제가 산업 전반의 중대한 화두로 떠올랐다. 그동안 ‘공정 이용’이라는 이름 아래 포장되어온 관행이 기술의 확산 속에서 더 이상 용인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AI 기업들과 콘텐츠 제작자 양측 모두에게 시급한 판단을 요구한다. 특히 한국은 주요국과 달

[피지컬 AI, 한국 제조의 다음 10년] 4부_“사라지는 명장 손맛, AI로 살린다”

경기도 시흥 정왕동에 들어서는 ‘피지컬 AI 확산센터’는 838㎡ 규모의 로봇·AI 실증 거점이다. 정왕어울림센터 5층 경기시흥 AI 혁신센터 내에 조성되며, 반월·시화 국가산단과 시흥스마트허브를 배후로 제조·물류 기업의 공정 데이터를 수집하고 로봇·AI를 실제 산업 현장과 유사한 조건에서 시험

[기획] 한미 FTA 무관세 체제 종료…15% 상호관세, 산업계 ‘직격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사실상 무력화됐다. 이달부터 미국이 한국산 수입품에 일괄 15% 상호관세를 도입하면서, 2012년 발효 이후 지속돼온 ‘무관세 프리미엄’ 체제는 막을 내렸다. 자동차, 철강, 기계 등 주력 수출 업종은 즉각적인 영향을 받고 있으며, 산업계는 현지화 확대와 외교적 대응을




산업전시회 일정


미리가보는 전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