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숫자 하나에 민감한 조직이다. 특히 부동산 담보대출의 핵심인 담보인정비율(LTV)은 은행의 건전성을 지키는 방패이자, 고객을 유치하는 창이다. 이 비율이 높으면 대출 한도가 늘어나 고객이 몰리고, 낮으면 리스크는 줄지만 영업 경쟁력은 떨어진다.
본래라면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벌여야 할 수치가 물밑에서는 엑셀 파일로 정리되어 경쟁 은행 담당자에게 건네지고 있었다. 수년간 이어진 은밀한 정보 공유는 후임자에게 업무 매뉴얼처럼 인수인계되기도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달, 국민·신한·우리·하나 등 4개 시중은행이 LTV 정보를 상시적으로 교환하며 경쟁을 부당하게 제한한 행위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총 2,72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고 21일 발표했다.
공정위는 2024년 11월 전원회의 심의와 이후 보강 조사를 거쳐, 해를 넘긴 2026년 1월에야 최종 제재를 의결했다. 이는 2021년 개정된 공정거래법이 ‘정보 교환에 의한 담합’을 금지한 이후 적용된 첫 번째 제재 사례다.
2년간 이어진 ‘정보 동맹’… 엑셀로 정리하고 파기
은행들은 전국에 산재한 부동산의 담보 가치를 평가할 때 지역과 용도(토지, 상가, 공장 등)에 따라 기준 LTV를 설정한다. 문제는 이 기준이 각 은행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라, 경쟁사의 정보를 참조해 조율된 결과였다는 점이다.
공정위 조사 결과, 4개 은행은 2022년 3월부터 2024년 3월까지 약 2년 동안 메신저와 유선 등을 통해 최소 736건에서 최대 7,500건에 이르는 LTV 정보를 교환했다. 담당자들은 경쟁사에서 받은 정보를 엑셀 파일로 취합해 내부 시스템에 반영한 뒤, 증거가 될 수 있는 문서는 파기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해당 정보는 단순한 시장 동향 파악용이 아니었다. 각 은행은 타행의 LTV와 비교해 자사의 비율을 조정하는 구체적인 내부 지침을 가지고 있었다. 경쟁사가 비율을 낮추면 따라 낮추고, 높이면 그에 맞춰 조정하며 사실상 경쟁을 회피한 정황이 드러났다.
리스크는 은행이 피하고, 피해는 차주가 떠안았다
이러한 정보 공유의 결과, 시장의 경쟁 기능은 현저히 약화됐다. 4대 시중은행이 국내 부동산 담보대출 시장의 약 60%를 점유한 상황에서 이들이 유사한 LTV를 설정하자 소비자의 선택권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피해는 고스란히 금융 소비자, 그중에서도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돌아갔다. 아파트와 달리 시세가 명확하지 않은 토지나 공장 등 비주택 담보대출의 경우, 정보를 공유한 은행들의 LTV는 비담합 은행보다 평균 8.8%포인트 낮게 설정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LTV 격차도 7.5%포인트에 달했다.
자금 조달이 생명인 중소기업들은 낮아진 대출 한도 탓에 고금리 신용대출을 추가로 이용하거나, 자금 융통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은행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리스크를 안전하게 분산하는 사이, 차주들은 더 높은 금융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 셈이다.
가격 담합 넘어선 ‘정보 담합’… 규제 패러다임 바뀐다
해당 사건은 공정거래법 집행 역사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다. 2021년 법 개정 이전에는 가격이나 수량을 직접 합의하는 명시적 담합만 제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정위 조치로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를 교환하는 행위 자체도 위법임이 확인됐다.
은행권은 그동안 리스크 관리와 건전성 유지를 위해 정보 공유가 불가피했다고 항변해왔다. 그러나 공정위는 이러한 정보 교환이 소비자 이익보다는 은행의 이익 보전 수단으로 변질됐다고 판단했다.
공정위의 철퇴는 단순히 2,720억 원이라는 과징금 액수에 그치지 않는다. 금융을 넘어 유통, 플랫폼, 통신 등 데이터가 핵심 자산인 산업 전반에 ‘정보 공유도 담합이 될 수 있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보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사장님들이 골프장에서 가격을 맞췄다면, 이제는 실무자들이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시장을 통제하는 시대다. 감시 당국의 칼끝이 ‘보이지 않는 정보’를 겨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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