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의 한 아파트. 전형적인 60대 은퇴자의 하루는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가 수면 데이터를 분석해 전송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공지능(AI) 스피커로 날씨를 확인하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반려동물 사료와 항노화 화장품을 결제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자녀의 부양에 의존하던 과거의 노년층 대신, 두둑한 지갑과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3억 명의 거대 집단이 중국 내수 시장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발간한 '실버경제, 고령화 시대 중국 시장의 신(新) 기회' 보고서는 중국 소비 시장의 무게 중심이 ‘디지털 실버세대’로 이동하고 있음을 수치로 보여준다. 2024년 기준 중국의 60세 이상 인구는 3억 1,0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2%를 차지하며, 2035년에는 4억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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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머릿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시장조사업체 프로스트 앤 설리번(Frost & Sullivan)에 따르면, 중국 실버 시장 규모는 2024년 8조 위안(약 1,600조 원)에서 2035년 30조 위안(약 6,000조 원)으로 확대돼 국내총생산(GDP)의 10%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적 여유와 디지털 기기 활용 능력을 동시에 갖춘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시장에 진입하면서, 요양과 복지에 머물던 실버 산업이 첨단 기술과 결합한 거대 소비 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데이터와 제어로 진화하는 3대 핵심 시장
KOTRA는 중국 실버 경제를 이끌 세 축으로 헬스케어, 멘탈 관리, 실버 정보통신기술(IT)을 제시했다. 소비의 목적이 ‘생존’에서 ‘삶의 질 향상’으로 이동하면서, 건강·정서·디지털 편의 영역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헬스케어 분야는 면역력 강화 식품, 수면 관리 제품, 항노화 스킨케어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특히 실버 뷰티 시장에서 항노화 스킨케어 제품의 비중이 45.8%에 달해 고령층의 강한 구매력을 보여준다. 4,5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요양 필요 인구를 겨냥한 성인용 위생용품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정서적 안정을 추구하는 멘탈 관리 시장의 성장세도 가파르다. 연령별 반려동물 관련 소비에서 6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38% 수준으로, 펫 소비가 대표적인 ‘힐링 지출’로 자리 잡고 있다. 전체 관광객의 37.8%를 50대 이상이 차지하면서 실버 관광은 여행 업계의 핵심 고객층으로 부상했다. 2024년 7,350억 위안 규모로 추산되는 양로원 시장은 향후 5년간 연평균 12% 성장할 것으로 예상돼, 요양 서비스와 연계된 레저·문화·교육 수요도 함께 커질 전망이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실버 IT 분야에서 나타난다. 재택 요양 비율이 90%를 넘어서면서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웨어러블 헬스기기와 실버 친화적 스마트홈 시스템 구축이 사실상 핵심 인프라로 여겨지고 있다. 전문 돌봄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양로 로봇 산업을 적극 장려하면서, 돌봄의 일부를 데이터와 기계가 분담하는 방향으로 구조적 전환이 가속화하고 있다.
단순 수출 넘어선 기술 융합과 현지화 필수
중국 정부는 2024년부터 실버 경제를 내수 진작의 핵심 동력으로 규정하고, AI·로봇 기반 ‘스마트 양로’와 ‘의료+돌봄 결합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게는 정보통신기술(ICT), 바이오, 첨단 제조 역량을 바탕으로 거대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셈이다.
KOTRA는 지난 8일 중국 우한에서 주우한대한민국총영사관, 한국보건산업진흥원과 함께 ‘한국-후베이 미래협력플라자-실버 헬스케어’를 개최해 양국 기업 간 협력망을 구축했다. 현장에서 국내 바이오스탠다드(BIOSTANDARD)가 중국 후야뷰티(HOYABEAUTY)와 300만 달러 규모의 수출 계약을 체결하며 실버 헬스케어 분야의 기술 경쟁력을 입증했다.
베이징에 ‘K-바이오 데스크’를 설치해 현지 기업 지원 창구로 운영 중이며, 베이징·정저우 등 주요 도시에서 ‘한-중 바이오 헬스케어 파트너십’, ‘K-의료기기 글로벌 파트너링’ 등 행사를 잇따라 열어 헬스케어·의료기기 기업의 중국 진출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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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원 KOTRA 중국지역본부장은 발표 자료에서 “중국 실버 세대는 비교적 안정적인 자산과 소득, 디지털 기기 활용 능력까지 갖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소비층으로 자리 잡고 있다”며 “한국 기업이 단순히 제품을 파는 수준을 넘어, 자국의 ICT·바이오 기술을 묶은 맞춤형 서비스 모델로 접근해야 시장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제품 구성과 마케팅 방식에서 차별화를 이루고, 중국 현지 수요에 맞게 상품과 서비스를 조정한다면 6,000조 원 규모로 성장할 실버 시장에서 수출 기회를 크게 키울 수 있다”며 “코트라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지원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고령화는 더 이상 일방적인 사회적 부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6,00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 실버 시장은 고령층의 자산·데이터·디지털 역량이 교차하는 새로운 전장으로, 기업의 기술력과 현지화 전략을 시험하는 거대한 무대로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