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정보기술(IT) 자본이 인공지능(AI) 워크로드를 감당하기 위한 인프라 확충으로 빠르게 쏠리고 있다.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비롯한 AI 최적화 프로세서 수요가 급증하면서, IT 투자의 무게중심이 개인용 기기에서 데이터센터·서버 등 인프라 영역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구조적 재편이 진행 중이라는 분석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Gartner)는 4월 23일(현지시간) 발표한 보고서에서 2026년 전 세계 IT 지출 규모가 전년보다 13.5% 증가한 6조3,165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2월 발표한 성장률 10.8%(6조1,500억 달러) 전망치를 상향 조정한 수치로, AI 인프라와 첨단 메모리를 중심으로 한 투자 확대가 생각보다 가팔라졌다는 의미다.
가트너 수석 VP 애널리스트 존 데이비드 러브록(John-David Lovelock)은 “AI 인프라와 첨단 메모리를 중심으로 시장의 성장 모멘텀이 한층 가속되고 있다”며 “AI 워크로드가 확대되면서 데이터센터 투자가 빠르게 늘고 있고, 이는 고성능 컴퓨팅 수요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흐름은 AI 최적화 프로세서, 가속기, 관련 기반 기술을 제공하는 기업들에 의미 있는 성장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가장 눈에 띄는 부문은 데이터센터 시스템이다. 가트너는 2026년 데이터센터 시스템 지출이 7,879억9,000만 달러에 달해 전년 대비 55.8% 급증할 것으로 내다봤다. 전체 IT 지출 증가분 가운데 상당 부분을 데이터센터 인프라가 책임지는 셈이다.
성장을 견인하는 주체는 하이퍼스케일 클라우드 사업자다. 생성형 AI 모델 훈련과 추론, 대규모 멀티모달 모델 서비스 등을 위해 GPU·가속기 클러스터, 고밀도 랙, 고속 네트워크를 갖춘 전용 데이터센터 투자가 이어지면서 서버·스토리지·네트워크 전반의 자본지출이 동반 확대되고 있다.
반면 스마트폰과 PC를 포함한 디바이스 부문 지출은 8,561억8,900만 달러로 8.2% 성장에 그칠 전망이다. 데이터센터 시스템과의 성장률 격차에는 메모리 반도체를 둘러싼 수급 구조가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러브록 애널리스트는 “강한 수요와 공급 제약이 맞물리며 HBM 가격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상승하고 있다”며 “이는 메모리 부문을 반도체 제조업체들에게 매우 수익성 높은 시장으로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메모리 가격 상승은 디바이스 시장에서는 평균판매가격(ASP)을 끌어올려 저마진 제품군의 교체 수요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AI 인프라를 확장하기 위한 메모리 수요가 데이터센터 업체와 메모리 제조사에는 호재로 작용하는 동시에, 디바이스 제조사와 소비자에게는 비용 부담과 교체 주기 지연이라는 ‘역설적인 파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하드웨어 인프라에 구축된 AI는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시장의 판도도 흔들고 있다. 가트너에 따르면 애플리케이션 구축 및 관리형 서비스, 인프라 구축 및 관리형 서비스, 서비스형 인프라(IaaS)를 포함한 IT 서비스 부문 지출은 2026년 1조8,701억9,700만 달러로 9.0% 증가해, IT 지출 항목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할 전망이다.
소프트웨어 부문 지출은 1조4,436억2,100만 달러로 15.1%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생성형 AI 모델 개발 관련 지출이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하면서 전체 소프트웨어 성장세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 가트너의 설명이다. 기업들이 단순한 백오피스 시스템 유지·보수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AI 모델 개발, 업무 프로세스 자동화, AI 내장형 SaaS 도입 등에 적극적으로 자본을 투입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흐름은 클라우드 인프라와도 맞물린다. 하이퍼스케일러의 서버·스토리지 투자 확대가 IaaS 지출을 끌어올리는 한편, 기업 입장에서는 복잡한 AI 인프라를 직접 구축하기보다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를 통해 ‘사용한 만큼 지불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가트너는 2월 전망에 이어 이번 4월 보고서에서도 “IT 시장이 단일한 속도로 성장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진단한다. AI 인프라와 생성형 AI 소프트웨어가 시장 평균을 훨씬 웃도는 성장률을 기록하는 반면, 전통적인 디바이스·통신 서비스 부문은 한 자릿수 성장에 머무르는 ‘다중 속도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가트너의 카테고리별 지출 전망을 보면, 데이터센터 시스템(55.8%), 소프트웨어(15.1%), IT 서비스(9.0%)는 두 자릿수에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는 반면, 디바이스(8.2%), 커뮤니케이션 서비스(4.8%)는 상대적으로 낮은 성장률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기업 IT 전략의 초점이 하드웨어 교체 주기 관리에서 데이터 제어·AI 연산 능력 확보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통신·디바이스 같은 전통 카테고리는 일정한 교체 수요에 기반한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하지만, 실제로 기업 경쟁력을 가르는 투자의 핵심 축은 AI 인프라·데이터 파이프라인·AI 내장형 소프트웨어로 옮겨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AI 인프라 투자가 과열 양상을 보이며 ‘버블’을 키우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러나 가트너는 2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친 전망에서 “투자 속도 조정은 있을 수 있지만, 방향 자체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러브록 애널리스트는 앞선 보고서에서 “AI 버블에 대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AI 관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전반에서 지출이 확대되고 있으며, AI 인프라 성장은 여전히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전망 역시 그 연장선에서, AI 인프라와 메모리가 향후 몇 년간 글로벌 IT 지출 상승분의 상당 부분을 흡수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재확인한 셈이다.
결국 2026년 IT 시장을 요약하는 키워드는 ‘쏠림’과 ‘속도차’다. 데이터센터와 AI 인프라는 거대한 자본을 끌어들이며 두 자릿수 이상의 성장 속도를 이어가는 반면, 디바이스와 통신 같은 전통 영역은 비용·가격 압박 속에서 한 자릿수 성장에 만족해야 하는 구조다. 기업과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 같은 다중 속도 구조 속에서 어디에, 얼마나 오래, 어떤 순서로 자본을 투입할지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