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를 읽고(센싱·처리), 그대로 기억하며, 곧바로 빛으로 보여주는 ‘만능 반도체’가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됐다. 기존 유기 반도체가 안고 있던 고전압 구동과 좁은 발광 영역의 한계를 극복한 초저전압 유기 발광 트랜지스터로, 차세대 지능형 웨어러블 전자소자 구현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초저전압 유기발광트랜지스터 동작 원리 및 웨어러블 응용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이태우 교수 연구팀은 매우 낮은 전압에서도 넓고 밝은 발광이 가능하면서, 정보 기억 기능까지 동시에 수행하는 새로운 유기 반도체 디바이스를 구현했다. 이 소자는 신호 처리, 메모리, 발광 기능을 한 칩에 통합한 전기화학 유기 발광 트랜지스터로, 기존처럼 별도 연산소자·메모리·디스플레이를 따로 만들고 연결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추진하는 미래유망 융합기술 파이오니아사업, 글로벌 리더연구 후속사업, 그리고 산업통상자원부·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의 인력양성 사업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연구 성과는 재료 분야 국제학술지 ‘네이처 머티리얼스(Nature Materials)’ 온라인판에 6월 8일자로 게재됐다.
웨어러블 전자기기는 단순히 심박·근전도 등 생체 신호를 측정하는 수준을 넘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하고 시각적으로 피드백을 주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문제는 센싱, 신호 처리, 메모리, 디스플레이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장치를 복잡하게 연결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구조가 커지고 딱딱해지며 전력 소모도 커진다는 점이다.
유기 트랜지스터는 유연한 유기 재료를 사용해 피부 밀착형·인체 친화형 전자소자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밝은 빛을 얻기 위해 수십~수백 볼트의 높은 전압이 필요하고, 발광 영역이 좁고 불안정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여기에 메모리 기능까지 더해 하나의 디바이스에 통합하는 데에는 전자 주입 방식·안정성 측면에서 기술적 제약이 뒤따랐다.
연구팀은 이러한 고전압·협소 발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전자 주입·발광 원리를 도입했다. 우선 유기 발광 트랜지스터의 활성층에 이온 수송을 촉진하는 물질을 첨가해 전극과 활성층 사이의 전자 주입 장벽을 낮췄다. 그 결과, 기존에 발광을 위해 최대 100V 수준까지 전압을 올려야 했던 구조와 달리, 일반 1.5V 건전지 두 개(3V 이하)만으로도 넓고 안정적인 발광이 가능한 소자를 구현했다.
또한 활성층 내부에 불안정한 도핑을 형성하는 기존 전기화학 트랜지스터 방식과 달리, 전기이중층(electric double layer)에 의한 전자 주입만으로 구동되는 구조를 제시했다. 이 방식은 소재가 갖는 고유 에너지 밴드갭 포텐셜보다 낮은 전압에서도 발광이 가능함을 실험으로 확인했고, 발광 영역이 넓고 위치가 고정돼 디스플레이 적용에 적합한 특성을 보였다.
이번 소자는 단순히 전압을 낮춘 수준을 넘어, 우리 몸 신경세포가 정보를 저장·학습하는 방식과 유사한 이온 이동 메커니즘을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외부 자극이 반복되면 소자 내부의 이온 분포가 변화하면서 도전도와 발광 특성이 장시간 유지돼, 마치 뉴로모픽 소자처럼 ‘자극을 기억하는’ 메모리 기능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하나의 반도체가 신호 처리·기억·표시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통합형 디바이스가 된다는 설명이다.
연구팀은 이 소자를 피부에 부착해 구동하는 온스킨(on-skin)형 웨어러블 디바이스 시연도 진행했다. 별도의 외부 컴퓨터나 디스플레이 없이, 입력된 신호를 디바이스 내부에서 바로 계산하고 그 결과를 실시간으로 빛으로 표시해주는 데모를 통해, 재활·운동·헬스케어 등 움직이는 환경에서의 실시간 상태 모니터링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기술은 스마트워치·밴드 수준을 넘어, 인공피부형 센서, 지능형 경고 시스템, 인공감각 인터페이스, 소프트 로보틱스 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반 기술로 평가된다. 낮은 전압으로 구동되고, 유연한 유기 재료 기반이라는 장점은 인체 안전성과 에너지 효율이 중요한 차세대 의료·헬스케어 기기에 특히 유리하다.
이태우 교수는 “계산 장치, 메모리, 표시 장치를 따로 제작해 복잡하게 연결하지 않고, 하나의 유기 반도체 디바이스 안에서 모든 기능을 통합 구현할 수 있음을 보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지능형 인공피부와 웨어러블 헬스케어 등 차세대 사용자 친화형 전자기기의 핵심 플랫폼 기술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최근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연이어 세계적 학술지(SCIENCE·NATURE 계열)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차세대 유연·웨어러블 전자소자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이번 연구 역시 발광 소자를 넘어, 센싱·신호처리·기억 기능을 저전압으로 통합한 ‘지능형 반도체 디바이스’라는 점에서 학술·산업적으로 모두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