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는 서울 내 다품종 소량생산의 기지”

10대부터 45년간 금속가공업 종사, 대현정공 허중범 대표

젊은 세대의 놀이터가 된 ‘힙지로’를 조금만 벗어나면 낡은 철공소 간판이 보인다. 이곳 을지로의 주민들은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제조업의 ‘힙’한 시대를 이끌어왔지만, 제조업 쇠퇴와 함께 찾아온 재개발 소식에 보금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본보에서는 을지로 제조업의 역사를 짚고, 이곳의 제조업 부흥을 이끄는 이들을 만나 을지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1편 : 서울 제조업의 중심지였던 ‘입정동’ 철공소 골목, 현재는?
2편 : “을지로는 서울 내 다품종 소량생산의 기지”

취재 : 고성현, 박소연


1950~60년대 산업화를 거치며 작은 공장촌으로 변모한 을지로 철공소 골목은 오랜 기간 동안 서울 도심 제조업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

골목에 위치한 수많은 철공소 중 허중범 대표가 운영하는 대현정공은 오랜 업력을 자랑한다. 허 대표는 각종 대학 연구소, 중소기업 등 300여개 업체들과 지속적으로 거래하며 45년간 금속가공업에 종사해왔다.

30년 전 열악한 환경에서 남들이 만들어내지 못하던 영사기를 생산하던 시절부터, 최근 드론 부품을 생산하기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을지로 골목에서 보낸 허 대표를 통해 철공소 골목의 흥망성쇠를 살펴봤다.


“을지로는 서울 내 다품종 소량생산의 기지” - 산업종합저널 동향
대현정공 허중범 대표


철 자재 2배 껑충…가공비는 동결

허 대표가 을지로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76년이다. 당시 10대였던 그는 모두가 배고프고 힘들던 시절, 먹고 살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어른들에 말에 따라 경기도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15일에 하루 쉬고, 하루에 14~15시간씩 일하는 힘든 일상이었지만, 일이 힘들다는 것을 채 느낄새 없이 을지로 골목에서 기술자로 성장해나갔다.

70-80년대 을지로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 한 허 대표는 ​“기계 한 대에 사람 한 명이 붙어 일을 해도 일이 넘쳐났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허 대표에 따르면 청계천 고가도로를 지나가는 행인 중 90% 이상은 철공소에 수주를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부품 하나를 생산해도 지금 가격의 세네배를 받으니 수입도 많았다.

그런 호시절을 뒤로 한 채 IMF 영향, 값싼 중국산 제품의 공세 등으로 을지로 철공소 골목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출근해서 기계 스위치도 한번 못 켜보고 퇴근하는 사람들도 많다”며 경기가 힘들다고 전한 허 대표는 원자재 상승을 최근 어려움의 원인으로 꼽았다.

허 대표에 따르면, 철 값이 두 배나 올랐지만 원자재 값이 올랐다고 해서 가공비를 더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격을 올리면 오랜 거래처에서 거래를 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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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의 상승도 대현정공 같은 소공인들에게 큰 부담이 됐다. 허 대표는 임금 상승으로 기술자 한명을 채용하면 오히려 적자가 나니 주위 소공인들은 일을 덜하고 직원을 고용하지 않는 추세라고 전했다.


“을지로는 서울 내 다품종 소량생산의 기지” - 산업종합저널 동향
허 대표는 최근 드론 부품 주문이 늘었다고 말했다.


일본도 있는 소규모 공장…우리는 왜 안돼?

‘마찌꼬바’라 일컬어지는 을지로의 소규모 공장들은 도심 내 다품종 소량생산의 기지 역할을 해왔다. 사용자마다 필요로 하는 부품의 종류가 다양한데, 부품을 가공하는데 필요한 기계 종류가 다르다.

“을지로 대부분의 업체들은 2-3종류 정도의 기계를 사용하고 있고, 5종류 이상의 기계를 돌리는 업체도 많다”며 “이런 기계를 사용해 고객이 샘플이나 도면을 주면 소량이라도 생산해낸다"고 허 대표는 말했다.

이어 “을지로 소공인들이 없어지면 부품을 받아서 기계를 조립하고 제작하는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허 대표는 뿌리산업 소공인들의 향후 전망에 대해 “지금 당장은 업계가 힘들지만 10년 정도만 지나면 귀한 직업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을 배우려는 젊은 사람들은 없고, 이 계통에 오랜 기간 종사했던 사람들은 노령화로 일을 그만두고 있기 때문이다.

제조 선진국인 일본의 경우에도 이런 소규모 공장 체제가 있다며 “이 일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의견을 표명했다.

실제로 일본 서부 히가시오사카에는 약 6천여 개의 공장이 밀집되어 있지만, 그 중 20인 미만 기업의 비율은 전체의 90%에 이른다. 금속·기계·전기·플라스틱 등의 부품부터 완제품까지 생산이 가능한 소규모 업체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산업이 쇠퇴하고 최근 경기가 어려워짐에도 허 대표가 을지로에 남아있는 이유는 “뿌리를 내리고 평생을 보낸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을지로 철공소 골목은 서울시 대규모 개발사업인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허 대표는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투자는 많은데 뿌리산업 소공인들에 대한 지원은 없다”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40년 넘게 을지로 기술자로 살아온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허 대표는 “재개발로 철수해야 할 때까지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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