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의 놀이터가 된 ‘힙지로’를 조금만 벗어나면 낡은 철공소 간판이 보인다. 이곳 을지로의 주민들은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제조업의 ‘힙’한 시대를 이끌어왔지만, 제조업 쇠퇴와 함께 찾아온 재개발 소식에 보금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본지에서는 을지로 제조업의 역사를 짚고, 이곳의 제조업 부흥을 이끄는 이들을 만나 을지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1편 : 서울 제조업의 중심지였던 ‘입정동’ 철공소 골목, 현재는?
2편 : “을지로는 서울 내 다품종 소량생산의 기지”
3편 : 도심 제조업 재생 사업 4년… 다시 서는 세운상가
4편 : 문경시보리, 을지로 철공소의 역사를 말하다
취재 : 고성현, 박소연
한때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든다’는 말까지 나왔던 세운·을지로 일대가 쇠락하고 있다. 제조업 불황과 재개발 이슈로 인한 불안이 도심 내 제조업을 지켜온 철공소마저 하나씩 문을 닫게 하고 있다.
이처럼 숱한 경제적 불안과 생존의 위기에도 이곳에서 40년 간 금속가공을 해온 문경시보리 한대식 대표, 그를 만나 을지로의 역사와 기술에 대해 들어봤다.
공장 노동자에서 ‘기술 장인’으로, 보람 가득한 40여 년의 세월
40여 년 전 금속 공장에서 일하던 한대식 대표는 을지로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그간 다져온 금속 가공 실력으로 다양한 기업의 수주를 받으며 선박용 수중 조명부터 가로등, 일반 조명 덮개까지 다방면의 부품을 제작해왔다.
이 일을 시작한 계기를 묻는 질문에 한 대표는 “금속을 깎는 일은 누구보다 정직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일을 게을리 하면 생산량이 줄고 제품의 모양도 흐트러지기 쉬운 것은 물론, 기업의 다양한 제작 요구를 충족하기도 어렵다. 대량 생산을 위한 금형을 직접 만들기에, 성실하게 쌓아온 결과물이 곧 ‘표준’이 된다는 게 한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회전하는 금속을 봉으로 굴절시키는 가공 방식인 스피닝(spininng, 시보리)기술을 연마했다. 끊임없이 이어진 노력은 1990년대부터 빛을 발했다. 전국에 노래방이 확산되며 미러볼을 제작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 대표는 “전국에 있는 노래방 미러볼의 70% 이상을 내가 제작했다”고 자신할 정도로 부지런히 제작했다.

한대식 대표가 최근 의뢰를 받아 제작 중인 캠프용 버너 커버. 금속 가공한 커버에 도색을 마치면 사진과 같은 완성품이 나온다.
이후 중국기업이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저가’ 전략으로 국내 기업의 수주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도심 제조업의 수요가 줄었지만, 문경시보리의 기계 가동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한 대표는 선박 수중 조명이나 캠프용 버너 등 다양한 수주를 받으며 학생들의 시제품, 세운협업지원센터와의 협업 등도 함께 진행해왔다며 “어떤 작업에도 보람을 느낀다”고 힘주어 말했다.
“도심 제조… 대중적 관심으로 확산 기대”
도심 제조업의 중심이었던 세운상가는 2000년대에 들어서며 위기를 맞았다. 2006년 재개발 계획이 반대에 부딪혀 소강상태가 됐지만, 2010년대 후반 재개발 계획이 가속화되면서 을지로 일대 제조업 단지가 단숨에 철거될 상황에 내몰린다.
이때 한 대표는 ‘산림동 상인 연합회’의 회장이 되어 재개발 반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을지로의 제조업 단지가 무너지면 중소기업의 기반도 무너진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한 대표에 따르면, 중국이나 국내 외곽의 대형 공장은 대량 생산만을 진행하기에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이 감당할 수 있는 제품 생산은 대부분 받아주지 않는다. 그들의 수주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비용 압박과 재고 관리 등의 리스크를 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재개발 시 제조업 종사자들에 대한 처우도 문제 중 하나였다. 을지로의 제조업 단지는 분업화돼 한 제품을 만드는 공정에 여러 공장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특정 분야의 상인들이 재개발로 흩어지게 된다면, 하나의 완성품을 협업해 제작하던 을지로의 시스템이 도미노처럼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이후 한 대표와 산림동 상인 연합회의 거듭 된 노력 끝에 제조업 종사자들이 재개발 구역에 재입주할 수 있게 되며 해당 문제는 일단락됐다. 한 대표는 점점 좁아지는 을지로 제조업의 판로를 넓히는 것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을지로의 금속가공 기술은 중소기업의 생존에 기여하는 ‘현역’ 기술”이라며 “도심 제조업에 대한 관심이 산업인에게 그치지 않고, 대중적 관심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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