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개봉한 SF 영화 'I, Robot'에서 윌 스미스가 분한 주인공은 위험한 공간에서 일하는 로봇을 본다. 그 장면은 더 이상 영화 속 상상이 아니다. 현재 전 세계 에너지 기업들의 정유소와 발전소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미국의 석유기업 셰브론(Chevron)은 정유소 순찰에 로봇견 '스팟(Spot)'을 투입했다. 네 발로 움직이는 스팟은 높은 곳을 기어올라가고, 진동하는 기계 위를 걸어다니면서 센서로 데이터를 수집한다. 정유소는 고온의 증기와 유해 가스가 떠도는 곳이다. 인간이 접근하기 위험한 그곳을 로봇이 대신 간다.
네덜란드 곡물 유통기업 카길(Cargill)의 시설에서도 스팟은 매일 일정한 거리를 같은 품질로 순찰하며 데이터를 수집한다. 한 사례에 따르면 스팟이 과열된 베어링을 감지해 예상하지 못한 설비 중단을 막았다. 정유소 하루 운영 중단은 수백만 달러의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에, 이러한 로봇의 역할은 단순한 자동화를 넘어 비즈니스 경영 문제가 된다.
AI가 영화 속 '자비스'가 되다
영화 'I, Robot'에서 토니 스타크의 AI 비서 '자비스'가 실시간 의사결정을 지원했다면, 현실의 에너지 산업에서는 이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 기업 셸(Shell)의 네덜란드 페르니스 정유공장은 그 대표 사례다. 수많은 센서가 압력·온도·유량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면, AI가 이를 분석해 설비 가동 조건을 자동으로 최적화한다. 결과는 극적이다. 예지 정비를 통해 설비 안정성과 비용 구조가 동시에 개선되었다.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발전소 터빈 등 주요 설비를 '디지털 트윈'으로 모니터링한다. 디지털 트윈은 실제 설비의 구조와 데이터를 가상 공간에 복제하는 '쌍둥이 모델'인데, GE의 SmartSignal APM 소프트웨어를 통해 고장 징후를 조기에 발견하고 정비 시점을 최적화한다. 전 세계 7,000개 이상의 자산에서 누적 16억 달러 이상의 비용 절감 효과가 보고되었다.
영화의 다음 장: 휴머노이드의 등장
'I, Robot'이 로봇견에 머물렀다면, 현실은 더 큰 야망을 품고 있다. 인간형 로봇인 휴머노이드가 에너지 산업으로 진입을 앞두고 있다. 글로벌 시장 규모는 가파르다. 휴머노이드 시장은 2025년 15억 달러에서 2035년 380억 달러로 10년 내 25배 성장이 예상된다. 이 거대한 시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국도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산업통상부 주도로 'K-휴머노이드 연합'이 2024년 10월 출범했다. 서울대, KAIST, 고려대, 포항공대 등 40개 기관이 참여하는 이 연합은 2030년까지 1조 원 이상의 민·관 투자를 추진할 계획이다.
구체적 목표도 명시했다. 2028년까지 다음 사양의 휴머노이드를 개발한다:
무게: 60kg 이하
관절 자유도: 50개 이상
들 수 있는 무게(페이로드): 20kg 이상
이동속도: 2.5m/s 이상
에이로봇, 홀레데이로보틱스, 원익로보틱스, 위로보틱스 등 국내 로봇 제조업체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데이터와 장비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최초의 사례로, 기업들이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정보까지 공유하는 이례적인 협력이다.
한국의 전략: 실증 현장까지 준비
K-휴머노이드 연합의 강점은 이론과 현장의 결합에 있다. 정부는 수요 기업의 참여를 적극 이끌어냈다. 삼성디스플레이, CJ대한통운, HD현대미포, 삼성중공업, 포스코E&C 등이 실증 장소와 데이터를 제공한다.
이들은 각각의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휴머노이드의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물류·유통 기업은 상하차와 운반 작업에 특화된 로봇을, 건설·조선 기업은 위험 지역 작업에 최적화된 로봇을 원한다. 이러한 실증 현장의 데이터가 다시 연구진으로 돌아가 AI 개발에 활용되는 선순환 구조다.
산업부는 2024년 로봇 제조사들에 2,000억 원 규모의 예산을 지원했다.
영화에서 놓친 것: 산업의 현실
그러나 영화 'I, Robot'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다. 에너지 산업에서 로봇과 AI 도입이 가속화되는 이유는 단순한 기술 진보 때문이 아니라, 산업 특성의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유·석유화학 플랜트, 발전소, 전력망은 안전·효율·지속가능성을 운영의 핵심으로 삼는다. 작은 효율 개선이 수천만 달러의 차이를 만들고, 가동률 안정성은 곧 배출 저감과 품질 확보로 이어진다. 동시에 규제 대응과 투자자 신뢰까지 직결되기 때문에 에너지 기업들은 새로운 기술을 누구보다 먼저 도입하고 검증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로봇견 스팟, AI 기반 예지정비, 디지털 트윈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경쟁력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기술이 확산되는 흐름
흥미로운 점은 이 기술들이 에너지산업을 통해 검증된 뒤 다른 산업으로 확산되는 패턴이다. 로봇이 정유소의 위험 지역 점검에서 검증되면, 물류와 건설 현장으로 확대된다. 디지털 트윈이 발전소의 안정성을 입증하면, 도시 인프라 관리로 이어진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에너지 산업은 '첨단 기술의 최전선'이자 동시에 '다른 산업의 스승'이 되고 있다.
'I, Robot'은 로봇이 인간 사회에 통합되는 미래를 상상했다. 위험한 작업을 대신하는 로봇, 인간과 협업하는 로봇의 모습 말이다.
그 상상은 에너지 산업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 정유소를 순찰하는 스팟, 데이터를 분석해 의사결정을 돕는 AI, 실제 설비를 가상으로 복제하는 디지털 트윈. 그리고 2028년, 한국에서 첫 번째 AI 휴머노이드가 산업 현장에 배치될 예정이다.
영화는 미래를 예측했고, 현실은 그 미래를 한 단계씩 실현해가고 있다. 차이라면, 영화는 기술을 낭만화했지만 현실은 기술을 철저히 비즈니스 논리 속에서 검증한다는 점이다. 그 과정이야말로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진정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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