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를 차량 가격에서 분리해 월 구독료로 이용하는 ‘배터리 구독’ 모델이 제도권 실증 단계에 들어간다. 전기차 가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배터리 비용을 금융·리스 구조로 재배치해 초기 구매 부담을 낮추고, 회수·재사용을 전제로 자원순환까지 엮는 새로운 실험이다. 정부가 모빌리티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차체와 배터리 소유권 분리를 허용하면서, 전기차의 소유·가격·관리 방식을 통째로 재설계하는 첫 관문이 열렸다.
차체·배터리 소유권 분리 허용…전기차 구매 구조 시험대
국토교통부는 최근 제8차 모빌리티 혁신위원회를 열고 ‘전기차 배터리 소유권 분리 기반 구독 서비스’에 대한 실증특례를 의결했다. 이에 따라 전기차 차체는 소비자가 소유하고, 배터리는 리스·금융사가 보유한 뒤 월 사용료를 받고 빌려주는 구조의 실증이 가능해졌다. 기존 자동차관리법 아래에서는 차체와 배터리를 일체로 등록하는 방식이어서, 소유권을 분리한 전기차 판매·운행 모델을 적용하기 사실상 어려웠다.
실증특례가 부여되면 사업자는 일정 규모의 전기차를 대상으로 ‘배터리는 구독, 차는 소유’하는 계약 구조를 실제 시장에서 시험할 수 있다. 정부는 준비기간을 거쳐 10월경부터 약 2년간 실증을 진행하고, 필요 시 추가 2년 연장을 포함해 최대 4년간 운영 성과와 소비자 반응을 지켜본 뒤 관련 제도화를 검토할 계획이다.
가격 구조 재편…초기 구매비용 vs 구독료
배터리 구독 모델의 출발점은 전기차 가격 구조다. 통상 배터리는 전기차 제조원가의 40% 안팎을 차지하는 고가 부품으로, 동일 세그먼트의 내연기관 차량 대비 높은 초기 구매 가격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돼 왔다. 이번 실증은 배터리 가격을 차량 구매 단계에서 떼어내고, 월 구독료 형태로 분산해 소비자 진입 장벽을 낮출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부와 업계는 차체만 구매할 경우 초기 차량 가격을 내연기관차 수준에 보다 근접하게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소비자가 실제 체감하는 부담은 구독료 수준, 계약 기간, 연간 주행거리, 중고차 가치 반영 방식 등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차량 가격을 월 납부 구조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한 ‘조삼모사’ 금융 기법”이라는 우려 역시 이 지점을 겨냥한다.
이 때문에 실증 단계에서는 차종별·운행패턴별 총소유비용(TCO)을 비교·분석해, 기존 일시구매·일반 리스 대비 어느 수준에서 비용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작업이 핵심 과제가 될 전망이다.
배터리 잔존가치·자원순환을 금융 구조에 편입
배터리 구독은 금융 상품 설계를 넘어, 배터리 자산의 수명주기 전체를 어떻게 관리·회수·재활용할 것인가를 시험하는 모델이기도 하다. 구독 계약이 종료되면 배터리는 리스사가 회수하게 되며, 성능 상태에 따라 차량용 재사용, 에너지저장장치(ESS) 전환, 재활용 공정 투입 등 다양한 방식으로 2차 활용이 이뤄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잔존가치는 이론상 구독료 산정에 반영될 수 있다. 회수·재사용으로 회수 가능한 가치를 미리 고려해 월 구독료를 설계하면, 동일한 차체 기준에서 소비자가 부담하는 실질 비용을 줄이는 방향의 구조 설계가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가 배터리 구독을 전기차 초기 구매 부담 완화뿐 아니라 자원순환 촉진과 연계해 설명하는 배경이다.
아울러 배터리가 금융사·전문 사업자 소유로 집중되면, 충·방전 이력과 성능 상태, 사고·정비 기록 등이 체계적으로 축적될 수 있다. 이는 향후 배터리 잔존가치 평가, 중고차 가치 산정, 배터리 보험 상품 개발 등 후속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로 꼽힌다.
책임·보증 구조는 그대로…그러나 더 복잡해지는 이해관계
소유 구조가 바뀐다고 해서 제조사의 안전·품질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국토교통부는 차체와 배터리가 분리 소유되더라도, 현행과 동일하게 전기차 제작자가 리콜, 무상수리, 교환·환불 등 소비자 보호 의무를 부담하도록 관리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안전 기준 적합성, 결함 시정, 배터리 화재 등 중대 사고 대응 책임은 기존 전기차와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의미다.
다만 실제 사고나 결함이 발생했을 때는 차체 제작사, 배터리 리스사, 금융사, 운행 사업자 등 여러 주체가 얽힌 책임 구조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구독료 연체나 계약 해지 시 배터리 회수 절차, 압류·담보 설정, 중고차 매각 시 배터리 구독 계약 승계 여부 등도 함께 풀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이번 실증은 이러한 법·실무 쟁점들을 사전에 드러내고, 제도화 이전에 보완할 수 있는 시험 무대 역할을 하게 된다.
전기차·배터리 산업 생태계에 미칠 파장
배터리 구독 모델이 국내 시장에 안착할 경우, 완성차·금융·렌털 업계와 배터리 제조·재사용·재활용 기업을 아우르는 새로운 가치사슬이 형성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는 차량 판매 이후에도 배터리 라이프사이클 전반을 아우르는 서비스·데이터 사업 기회를 확보할 수 있고, 금융사는 차량 금융을 넘어 배터리를 독립된 자산군으로 다루는 비즈니스 영역을 넓힐 수 있다.
배터리 제조사·2차 사용 사업자에게는 회수·재사용 배터리 수급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공급 기반 강화 효과가 기대된다. 반대로, 배터리를 장기간 소유·운행하며 감가상각을 최대한 활용해 온 사업용 차량 운영자 입장에서는 “배터리 자산을 온전히 보유하는 전략”과 “구독 모델로 리스크를 외부화하는 전략” 사이에서 선택지가 갈릴 가능성도 있다.
정책 측면에서는, 이번 배터리 구독 실증이 성공 사례로 평가될 경우 전기승용차뿐 아니라 택시, 카셰어링, 전기버스·전기화물차 등 상용·플릿 분야로 확대 적용하는 방안도 논의될 수 있다. 특히 배터리 교체 주기와 잔존가치 관리가 핵심 리스크인 상용차 부문에서 구독 모델은 비용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재무 구조를 안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업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배터리 구독은 아직 제도화가 확정된 완성형 모델이 아니라,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장점과 부작용을 함께 드러내야 하는 실험 단계다. 전기차 가격 장벽 해소, 배터리 수명·안전 리스크 외부화, 자원순환 촉진이라는 세 가지 목표가 실제 소비자·사업자 관점에서 균형 있게 달성될 수 있을지, 향후 2~4년간의 실증 결과가 전기차 산업의 다음 공식을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