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폴리실리콘을 다시 국가안보 소재로 끌어올렸다. 단순히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저가 수입품에는 최저수입가격제를 적용하고 잉곳·웨이퍼·셀 등 파생상품에는 관세를 매긴다. 미국 내 생산시설 투자기업에는 관세 면제 혜택도 준다. 폴리실리콘에서 출발해 태양광과 반도체로 이어지는 공급망의 미국 내 생산과 조달 기반을 강화하려는 정책 의도가 뚜렷하다.

박정성 산업통상부 통상차관보는 기후에너지환경부를 비롯한 관계부처와 태양광협회, 한화큐셀, OCI, 반도체협회, SK실트론, 삼성전자 등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미국 폴리실리콘 232조 관세 관련 합동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한국 기업의 영향 최소화 방안을 포함한 대응책을 모색했다.(사진=산업통상부)
산업통상부가 지난 11일 삼성전자와 한화큐셀, OCI, SK실트론 등 업계와 민관합동 대책회의를 연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조치는 폴리실리콘 원료의 대미 수출에만 영향을 주는 사안이 아니다. 미국에 진출했거나 투자 중인 국내 기업의 원료 조달 구조와 태양광·반도체 공급망 전반에 변수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미국의 조치 배경에는 자국 제조 기반 약화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 있다. 미국 정부는 자국의 세계 폴리실리콘 생산능력 비중이 2005년 약 50%에서 2024년 2% 미만으로 낮아졌다고 보고 있다. 태양광용 잉곳과 웨이퍼, 셀 역시 수입 의존도가 높은 품목이다. 글로벌 폴리실리콘 공급 과잉과 저가 제품 확산이 이어지면서 미국 내 생산기반이 가격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다.
폴리실리콘은 태양광 소재에 그치지 않는다. 고순도 폴리실리콘은 반도체용 실리콘 웨이퍼 생산의 출발점이다. 반도체는 통신·전자전·미사일·드론 등 첨단 방산체계와 연계된 전략 품목이고, 태양광은 AI 데이터센터 확대 등으로 늘어나는 전력 수요와 맞물린다. 미국이 폴리실리콘을 무역확장법 232조의 틀로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전략산업 공급망 보호 범위를 핵심 소재 단계까지 넓힌 조치로 해석된다.
최저가격·관세·투자유인 결합
새 제도는 오는 12월 4일부터 시행된다. 폴리실리콘의 최저수입가격은 ㎏당 21달러, 잉곳과 웨이퍼는 ㎏당 100달러다. 태양광 셀은 와트당 0.22달러, 모듈은 와트당 0.38달러로 정해졌다. 신고가격이 이 기준보다 낮으면 저가 수입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구조다.
폴리실리콘 파생상품인 잉곳·웨이퍼·셀 등에는 15%의 무역확장법 232조 관세도 적용된다. 다만 한국은 기존 최혜국대우(MFN) 관세와 232조 관세를 합산해 총 15%가 적용된다. 따라서 한국 기업에는 기존 관세에 15%가 별도로 더해지는 방식이 아니라, 품목별 기존 관세를 포함한 총 부담이 15% 수준으로 맞춰지는 구조다.
눈여겨볼 대목은 온쇼어링 인센티브다. 미국 내에서 폴리실리콘 및 파생상품 생산시설을 신설하거나 보수·증설하려는 기업은 미 상무부 승인과 개별 협의를 거쳐 관세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투자 규모와 건설 기간 등에 상응하는 범위에서 필요한 생산설비와 대상 제품을 232조 관세 없이 들여올 수 있다. 단, 2029년 1월 20일까지 미국 내 착공을 확약해야 한다. 관세 장벽과 투자 인센티브를 결합해 미국 내 생산능력 확충을 유도하는 장치다.
韓 기업 영향은 공급망 구조가 가른다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원료 수출액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산업부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이번 포고령의 조치 대상인 한국의 대미 폴리실리콘 수출 규모는 약 220만달러다. 반면 폴리실리콘 파생상품의 대미 수출 규모는 약 4억3000만달러로 추산된다. 영향의 초점이 원료 자체보다 잉곳·웨이퍼·셀 등 파생상품과 이를 활용하는 미국 현지 생산망에 있을 가능성이 큰 이유다.
태양광 업계에는 기회와 부담이 공존한다. 최저수입가격제가 저가 제품의 미국 시장 진입을 어렵게 하면, 가격 경쟁으로 시장을 넓혀온 공급자와의 격차를 줄일 여지가 생긴다. 미국 내 셀·모듈 생산 비중이 높고 원료와 중간재 조달을 현지화한 기업에는 경쟁 여건 개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면 해외산 폴리실리콘과 웨이퍼 등 중간재 의존도가 높은 미국 현지 생산기업에는 조달비 상승과 공급선 재편 부담이 생길 수 있다. 보호장벽이 완제품 수입만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공장을 움직이는 원료와 중간재의 이동 경로까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단기 비용보다 규제 범위 확대의 신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조치의 직접 영향은 적용 품목과 미국 현지 생산법인의 원료·웨이퍼 조달 구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만 미국이 완제품과 제조장비를 넘어 핵심 소재 단계까지 국가안보 관리 대상으로 편입했다는 점은 향후 전략산업 공급망 규제의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
정부 대응 역시 단순한 관세 협상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기업별로 어느 국가에서 폴리실리콘과 웨이퍼를 조달하고, 어느 공정에서 가공한 뒤, 어떤 형태로 미국 시장에 공급하는지 제품과 공정 단위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미국 현지 생산 확대 계획이 있는 기업 가운데 온쇼어링 인센티브를 활용할 수 있는 대상도 선별해야 한다.
수출 중심 기업과 미국 현지 생산기업은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다. 미국 내 생산기반을 가진 기업에는 경쟁 여건 개선과 투자 인센티브가 기회가 될 수 있지만, 해외 조달 의존도가 높은 기업에는 비용 상승이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정부가 기업별 공급망 구조와 투자계획을 바탕으로 맞춤형 대응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정부는 지난해 8월 폴리실리콘 232조 조사 관련 입장서를 제출하는 등 대응해 왔다. 앞으로는 관계부처와 업계가 대미 수출, 미국 현지 투자, 원료 조달 구조를 함께 점검하면서 미국 측과 협의해 기업 부담을 줄여야 한다. 박정성 산업통상부 통상차관보도 대책회의에서 이번 조치가 업계에 미칠 장·단기 영향을 면밀히 점검하고 필요한 지원을 적시에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이번 조치는 15%라는 관세율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최저수입가격제와 투자 연계형 관세 면제를 결합해 미국 내 생산과 조달을 늘리려는 정책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에는 단순한 관세 부담 계산을 넘어 원료 조달처, 가공 거점, 미국 현지 생산계획을 함께 재점검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폴리실리콘을 겨냥한 이번 조치는 글로벌 제조 공급망의 재편 압력을 한층 높이는 신호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