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가 추진하는 대산 석유화학 사업재편을 조건부 승인했다.
구조조정 자체는 허용하되 국내 저밀도 폴리에틸렌(LDPE)과 에틸렌 비닐아세테이트(EVA) 시장의 경쟁 사업자가 4곳에서 3곳으로 줄면서 가격 인상과 공급 축소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공정위는 향후 5년간 국내 가격 변동률을 수출가격 변동률 기준으로 제한하고 기존 제품의 공급 유지와 경쟁민감정보 차단 등을 의무화했다.

발표 내용을 토대로 제작한 이미지(생성형 AI 활용)
전성복 공정위 기업거래결합심사국장은 20일 브리핑에서 이번 기업결합으로 국내 LDPE·EVA 시장의 과점이 심화해 경쟁사업자 간 가격 협조가 쉬워지고 저수익 품목 생산 중단과 가격 인상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격·공급·정보교환·인사 관련 시정조치를 통해 경쟁제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이날 HD현대케미칼의 롯데대산석화 흡수합병과 롯데케미칼의 HD현대케미칼 추가 지분 취득이 포함된 ‘대산 1호’ 기업결합에 대해 시정조치를 조건으로 승인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결합이 마무리되면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는 HD현대케미칼 지분을 각각 50%씩 보유하고 공동 지배한다. 대산산업단지에 있는 롯데케미칼 대산공장과 HD현대케미칼의 나프타분해설비(NCC)와 석유화학제품 생산시설도 통합 운영된다.
공정위가 문제 삼은 것은 LDPE와 EVA 시장의 과점 심화다. 결합 전 한화, LG, 롯데, HD현대 등 4개 사업자가 경쟁하던 시장은 한화와 LG, HD현대케미칼 등 3개 사업자 체제로 재편된다. 생산능력 기준 3사의 비중은 약 50대 25대 25이며, 판매량 기준 3사 합산 점유율은 LDPE 82%, EVA 95%에 달한다.
공정위는 사업자 수 감소에 제품의 높은 동질성, 경쟁사의 생산능력과 국제가격 등을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시장 특성이 맞물리면 가격과 물량을 둘러싼 사업자 간 협조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공급과잉이 이어졌던 과거 국내 LDPE 시장에서 10년 넘게 가격 담합이 지속된 전례도 심사 과정에서 고려했다.
신규 사업자가 만들어낸 가격 경쟁이 약해질 가능성도 판단 근거가 됐다. HD현대케미칼은 2021년 말부터 석유화학 제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판매하기 시작한 신규 진입자로, 공정위에 따르면 시장에서 가장 낮은 가격으로 LDPE와 EVA를 공급해 왔다. 기존 사업자인 롯데케미칼과의 결합으로 이 같은 경쟁 압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합 뒤 저수익·저가 제품 규격인 일부 그레이드의 생산을 중단할 가능성도 문제로 꼽혔다. LDPE와 EVA 수요자의 상당수가 중소 플라스틱 가공업체이고 납품처가 특정 규격을 지정하는 경우가 많아 거래선을 쉽게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경쟁사의 설비 가동률도 95~100% 수준이어서 공급이 중단된 제품을 곧바로 대체 생산하기 어렵다고 공정위는 봤다.

전성복 공정위 기업거래결합심사국장(e브리핑 영상 캡처)
공정위는 이에 따라 시정명령을 받은 날부터 5년간 LDPE와 EVA 국내 가격 변동률을 수출가격 변동률에 연동하도록 했다. 수출가격이 직전 3개월과 비교해 오르거나 동결될 경우 국내가격 인상률은 수출가격 인상률 이하여야 하고, 수출가격이 내리면 국내가격 인하율은 수출가격 인하율 이상이어야 한다.
수출가격을 기준으로 삼은 데 대해 전 국장은 국내시장보다 경쟁이 치열한 수출시장의 가격이 경쟁가격에 상대적으로 가깝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업결합 시정조치로 가격 변동을 직접 제한하는 방식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도 사용된 행태적 조치라고 말했다.
공급 의무도 함께 부과했다. 결합 당시 생산하던 모든 LDPE·EVA 그레이드에 대해 국내 수요자가 요청한 물량을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인 조건으로 공급해야 한다.
가격·수량·원가·재고량 등 경쟁민감정보의 공유도 제한된다.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 HD현대오일뱅크 사이에 정보 차단 장치를 두고 HD현대케미칼과 롯데케미칼 간 임직원 겸임도 금지한다. 사업재편 과정에서 HD현대케미칼로 전적한 롯데케미칼 임직원이 복귀할 경우에는 1년간 LDPE·EVA 관련 부서 배치와 관련 계열사 파견을 제한한다.
시정조치 기간은 5년으로 정해졌다. 전 국장은 사업재편 기간이 약 3년이고 통합 이후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그 이후 본격화할 수 있다는 점, 중국과 해외 경쟁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5년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기간 중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5년 뒤에도 경쟁제한 우려가 남아 있다고 판단하면 시정조치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이번 심사는 지난해 11월 임의적 사전심사 신청을 받은 뒤 시작됐고, 당사자들은 올해 6월 정식 신고했다. 공정위는 20개 석유화학 제품의 생산·판매·수출입 현황을 분석하고 이해관계자와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롯데케미칼과 한화솔루션, DL케미칼, 여천NCC가 추진하는 ‘여수 1호’ 사업재편도 심사가 진행 중이다. 계획대로 사업재편이 이뤄지면 롯데케미칼을 매개로 LDPE·EVA 사업을 하는 합작법인 사이에 지분 연계가 생긴다. 전 국장은 대산 1호 결합으로 바뀐 시장 구조와 경쟁제한 가능성을 여수 1호 심사에서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