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촬영물 사이트를 차단해도 1~2시간이면 도메인을 바꿔 다시 열고, 삭제 요청에도 재게시를 반복하는 현실에 정부가 대응 기조를 바꾸기로 했다. 피해 영상 삭제 지원에 머물던 방식에서 벗어나 불법사이트 자체를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디지털성범죄 대응의 무게중심을 옮기겠다는 것이다.
운영자 검거를 위한 전담 수사팀을 꾸리고 광고와 계좌를 막아 수익원을 차단하는 한편, 주소를 바꿔가며 차단을 피하는 사이트는 인공지능(AI)으로 추적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불법사이트 개설 행위를 별도 범죄로 처벌하는 법 개정과, 법원 영장을 전제로 수사기관이 사이트에 직접 접속하는 ‘능동적 방어’ 제도 도입도 검토 대상에 포함됐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은 20일 관계부처 합동 브리핑에서 “가해자가 날아갈 때 정부는 뛰고 있었던 것 같다”며 “이제는 날아가는 가해자 앞에 서서 가해자의 길목을 차단하고 피해자를 지키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성평등가족부와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경찰청은 이날 ‘불법촬영물등 유통사이트 심층분석을 통한 불법사이트 통합 대응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은 중앙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2018년 5월부터 2026년 5월까지 피해자 삭제 지원 과정에서 수집한 불법사이트 3만 4,628개와 최근 5년간 검거된 27건의 수사자료를 분석해 마련됐다.
사이트 5곳 중 1곳 여전히 접속 가능
분석 대상 3만 4,628개 사이트 가운데 6,683개, 전체의 19.3%는 여전히 접속 가능한 상태였다. 이 가운데 3,832개는 별도의 우회 절차 없이 국내망에서도 접속이 가능했다.
접속 가능한 사이트 중 한국어로 운영되거나 ‘Koreanporn’ 등 한국 관련 카테고리를 둔 곳은 1,316개로 집계됐다. 정부는 이들 사이트에 게시된 한국인 관련 영상이 약 215만 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일부 영상에는 이름, 직업, 거주지역, 연락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 등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신상정보도 함께 게시된 것으로 조사됐다. 피해 영상 유통이 단순 게시를 넘어 피해자의 일상과 인격을 지속적으로 침해하는 양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운영 구조도 조직화돼 있었다. 무료 개방형 사이트는 불법촬영물을 복제한 백업사이트를 운영하며 다량의 영상을 유포하고, ‘도촬’이나 ‘N번방’ 같은 성착취 카테고리를 별도로 둔 것으로 파악됐다.
유료 회원제 사이트는 회원 등급에 따라 접근 가능한 게시판을 나누고, 영상 업로드나 도박사이트 가입, 암호화폐 등을 통해 포인트를 얻어야 등급을 올릴 수 있게 해 불법촬영물 유포를 구조적으로 유도하는 형태를 보였다.
웹 구조와 도메인, 콘텐츠 등 기술적 흔적을 추적한 결과 겉으로는 별개 사이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운영자가 관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385개 그룹도 식별됐다. 이 가운데 일부는 20개 이상의 사이트를 동시에 운영했고, 한 그룹이 최대 26개 사이트를 굴린 사례도 확인됐다.
원 장관은 “불법촬영물 유통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적·기업화된 범죄 생태계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광고·계좌 차단으로 불법사이트 돈줄 봉쇄
정부는 사이트 차단과 함께 수익원 봉쇄를 핵심 대응 축으로 제시했다. 국내망으로 접속할 수 있고 배너광고가 확인된 1,674개 사이트에는 도박·성매매 관련 광고 4만 686개가 게재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이 2021년 이후 검거한 27건, 126개 불법사이트 수사자료를 분석한 결과 불법사이트의 주 수익원은 배너광고 수익이었고, 범죄수익은 약 304억 원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불법촬영물 유통사이트에 광고를 게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제재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할 방침이다. 또 특정금융거래정보법상 강화된 고객확인제도를 활용해 불법사이트 운영에 이용된 계좌에 대한 거래 정지도 추진한다.
해외 서버에 숨어 삭제 요구를 거부하는 사이트 대응도 강화한다. 정부는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에 한국인 피해 신고를 전달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고, 해당 사이트를 호스팅하는 해외 호스팅·콘텐츠전송네트워크(CDN) 사업자에게 관계부처 공동 명의로 서비스 중지를 요청할 계획이다.
원 장관은 “피해자의 성착취물이 누군가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수익 차단, 운영자 검거를 위한 집중 수사, 처벌 강화 등 불법사이트 자체를 무력화하는 데 모든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운영자 ‘방조범’ 아닌 정범 처벌…전담수사팀 4개 팀 출범
정부는 불법사이트 개설 행위를 도박장 개설죄와 유사하게 독립 범죄로 규정하는 법 개정도 검토한다. 사이트 개설·운영 자체를 직접 처벌하는 규정이 없어 지금까지는 성착취물 제작·유포의 방조범으로 다뤄지는 한계가 있었다는 판단에서다.
경찰은 하반기 중 불법사이트 전담 수사팀 4개 팀, 20명 규모를 우선 출범시킬 계획이다.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경찰은 불법사이트 제작·유포 행위에 대해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엄정하게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사기관이 법원의 영장을 받아 사이트에 직접 접속해 수사 단서를 확보하고 원본 데이터를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능동적 방어’ 제도 도입도 검토 대상이다. 유 직무대행은 영국과 호주처럼 법적 근거와 법원 영장을 전제로 제도를 운영하는 방안을 살펴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해외 서버에 대한 직접 접근은 다른 국가의 관할과 충돌할 수 있는 만큼, 원본 서버 위치가 확인되거나 피의자가 특정되는 경우에는 해당 국가 법 집행기관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함께 언급됐다. 구체적인 집행 범위와 절차는 향후 입법 논의 과정에서 다뤄질 전망이다.
AI로 도메인셔틀링 추적…암호화 통신 차단기술도 검토
정부가 AI 기술 도입을 전면에 내건 것은 현재 차단 방식만으로는 사이트 재등장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현서 디지털성범죄피해통합지원단 부단장은 브리핑에서 “현재는 차단된 사이트가 1~2시간 이내에 바로 도메인을 바꿔 다시 사이트가 개설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 부단장은 이어 “도메인셔틀링을 하는 사이트를 빠르게 탐지할 시스템이나 기술력이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정부는 URL과 실제 IP, 웹 구조, 콘텐츠 등 다차원 정보를 함께 분석해 동일·유사 사이트를 식별하는 AI 기반 전 주기 대응 시스템을 개발할 계획이다.
이 시스템은 탐지·수집부터 동일성 및 계보 분석, 수익원과 범죄 네트워크 역추적, 긴급차단과 수사 연계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방식으로 구상됐다. 정부는 도메인을 바꾼 사이트가 기존 불법사이트와 높은 유사성을 보일 경우 더 신속하게 차단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국내망에서 접속 가능한 불법사이트가 상당수 남아 있는 배경으로는 심의 요청이 이뤄지지 않은 경우와 기술적 한계가 함께 지목됐다. 노 부단장은 QUIC, ECH 등 고도화된 암호화 통신 기술로 인해 인터넷 관문 단계에서 차단이 어려운 사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신영규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방송통신이용자정책국장은 “트래픽 전체가 암호화되면서 ISP 단계에서 차단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고 있다”며 “기존 복호화 기술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암호화된 상태에서도 차단할 수 있는 기술 개발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평등부 장관에 긴급 차단 요구권…입법 논의 착수
정부는 삭제 요구에도 지속적·반복적으로 불응하는 사이트에 대해 성평등가족부 장관이 기간통신사업자에게 직접 접속 차단을 요청할 수 있는 ‘긴급 차단 요구권’ 도입도 추진한다. 차단 절차 자체를 줄여 대응 속도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노 부단장은 “법안 초안은 마련했다”며 “정기국회가 시작되기 전 성평등가족위원회 위원들을 중심으로 법안을 설명하고 있고, 관심 있는 의원들과 개정안 발의 시기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방송미디어통신심의위원회 심의 방식도 손질될 전망이다. 이미 심의한 불법사이트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이트는 기존 심의 결과를 토대로 보다 신속히 차단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이와 함께 플랫폼 사업자가 자사 서비스에서 불법촬영물 등으로 의심되는 콘텐츠를 발견하면 이용자 ID와 IP 주소 등을 신고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도 검토된다. 정부는 현재 부가통신사업자 중심의 유통 방지 책임을 플랫폼, 호스팅, CDN, ISP 등 유통 단계 전반으로 넓히는 방안도 함께 살피고 있다.
스팸문자를 통한 유입 차단도 대책에 포함됐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수집한 불법·유해사이트 정보를 관계기관이 공유하고, 스팸문자 키워드 필터링을 통해 불법사이트 정보가 발송되는 단계에서부터 차단하는 한편 관련 전화번호 이용 정지도 추진한다.
예방교육·통합 대응체계·특별법 제정도 검토
정부는 차단과 수사 강화에 더해 예방 대책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불법촬영물 소지·시청·저장의 불법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이고, ‘디지털 성범죄STOP 통합누리집’과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생각함’을 통해 불법사이트 제보와 정책 제안을 상시 접수할 계획이다.
초·중·고교와 대학에는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 콘텐츠를 배포하고, 학교 내 불법촬영 취약 공간 점검도 지원한다. 정부는 범정부 협의체와 실무협의체를 통해 대책 이행 상황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중장기적으로는 피해 접수부터 삭제 명령, 사업자 제재, 예방적 감독까지 아우르는 통합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디지털성범죄 관련 특별법 제정도 검토할 방침이다. 생성형 AI를 악용한 딥페이크 성범죄에 대해서도 별도의 대응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원 장관은 “그동안 정부 대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책 이후 계속 점검하고 피해자 중심의 통합 대응을 마련하는 데 부족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불법촬영물 확산의 근원인 불법사이트를 무력화하고 성착취 생태계를 바꾸는 데 모든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