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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디지털 사다리를 끊어버린 정부

스마트공장 기초예산 전면 삭감, “현장의 절박함 앞에서 예산은 고개를 돌렸다”

[데스크칼럼] 디지털 사다리를 끊어버린 정부 - 산업종합저널 정책
중소기업이 ‘디지털 전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은 구호이기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다. 데이터를 모으고, 공정을 자동화하고, 생산성을 높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당장 전기세 낼 돈도 빠듯한 영세 제조업 입장에서 그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때 정부가 내민 손이 ‘스마트공장 기초단계 예산’이었다. 처음 디지털을 도입해보는 중소기업에게, 기술적 뼈대를 세우도록 도와주는 첫 사다리였다. 그런데 그 사다리를 지금 정부가 통째로 치워버렸다.

2020년 3천억 원이 넘던 기초단계 예산은 2022년 1천100억 원으로 줄더니,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아예 전면 삭감됐다. 내년도 예산안에도 이 사업은 없다. 대신 정부는 고도화 단계,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을 중심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했다”고 했다. 하지만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디지털 전환을 해본 적조차 없는 기업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라는 말인가.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전국 17개 시·도를 상대로 직접 확인한 결과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었다. “기초예산 복원이 필요하다”고 밝힌 곳이 16개 지자체에 달했다. 그들의 답변은 절박했고, 하나같이 비슷했다. “현장의 디지털 전환 사다리가 끊겼다”, “자부담이 감당되지 않아 사업을 포기했다”, “ICT 미적용 기업은 아예 접근조차 못 한다.” 각 지자체는 자신들의 예산으로 어떻게든 기초사업을 유지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물량은 턱없이 부족했고, 포기 기업은 늘고 있었다. 경남은 전체 신청 기업의 절반도 지원하지 못했다. 전남은 국비가 끊긴 뒤 지방비 비율을 두 배로 늘렸지만, 기업들이 버티지 못하고 해마다 사업에서 빠져나갔다. 전북, 강원, 충북, 세종은 입을 모아 “기초예산이 없으면 기업들이 첫걸음조차 못 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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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AI 이미지

중소벤처기업부는 “고도화”를 말하지만, 발을 뗄 땅이 없다면 방향은 의미가 없다. 정부는 지금, AI 전환을 이야기하면서 그 전 단계의 발판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영세 제조기업은 화려한 기술보다, 문을 닫지 않을 최소한의 뼈대를 원한다. 특히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지방은 이 기초예산이 유일한 생명줄이다. 이를 외면하는 것은 지역균형발전과도 모순된다.

스마트공장은 ‘공장’이 아니라 ‘현장’이다. 예산의 눈이 아닌, 노동자의 손과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기초단계 지원이란, 바로 그곳에 디지털의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AI 공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고 있는 공장이 문 닫지 않도록, 기술이라는 언어를 처음 배울 수 있도록, 누군가 처음 사다리를 놓아줘야 한다. 지금 정부는 그 사다리를 뽑고, 그 빈자리를 무시한 채 고도화라는 구호만 남겼다.

김정호 의원은 “스마트공장은 데이터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맞다. 하지만 그 데이터는 고위 관료의 브리핑 자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데이터는 불량률을 낮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규모 생산 라인에서 나오고, 납기일을 지키기 위해 밤을 새우는 영세업자들의 땀에서 나온다. 지금 정부가 그들의 입구를 막아버렸다는 사실, 그것이 더 심각하다.

제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사라진 기회는, 한 번도 디지털을 경험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에게는 영원한 단절이 된다. 기초예산은 기술을 위한 게 아니다. 생존을 위한 것이다. 정부가 진정 산업경쟁력을 말하고 싶다면, 그 말은 당연히 기초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산업종합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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