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기술이 더 이상 기업의 경쟁력만을 좌우하는 시대는 끝났다. 반도체, 2차전지, 인공지능 등 핵심 기술을 둘러싼 쟁탈전이 경제 질서 전체를 다시 짜고 있다. 기술은 무기가 됐고, 기술을 지키는 일은 안보가 됐다. 18일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파르나스에서 열린 ‘산업기술보호의 날 및 2025 산업보안 컨퍼런스’는 이 시대 변화의 경계를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이 행사는 산업통상자원부와 국가정보원이 공동 주최한 국내 최대 규모의 기술보안 행사로, ‘기술패권 시대의 경제안보 전략: 보호, 협력 그리고 생존’을 주제로 500여 명의 산업보안 전문가들이 모였다. 단지 표창과 발표가 오간 자리가 아니었다. 기술패권이 만들어낸 신질서 속에서 한국이 어떤 전략으로 살아남을지를 진지하게 묻는, 국가 차원의 ‘기술 생존 전략 콘퍼런스’였다.
1부 기념식에서는 산업기술 유출 방지에 기여한 유공자 6명에게 산업부·국정원 표창이 수여됐다. 이어 연단에 오른 마틴 길 미국산업보안협회 부회장은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기술만이 아니라, 그 기술을 지키는 보안역량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신뢰 가능한 파트너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기술 보호 시스템이 제품 품질만큼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어진 2부 기술세션에서는 △미국의 기술유출 대응 현황 △AI 기반 핵심기술 식별 및 유출 탐지 시스템 △첨단기술 법제 현황 △산업기술보호법 개선 방향 등이 발표됐다. 모든 발표가 공통으로 지적한 점은 하나다. 기술 탈취와 침해는 더 이상 물리적 유출에 국한되지 않으며, 디지털 환경 속에서는 ‘보안’과 ‘식별’ 능력 자체가 국가경쟁력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국정원 이동수 1차장은 이 자리에서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기술은 안보이자 경제 그 자체가 됐다”고 선언했다. 이어 “이번 컨퍼런스를 통해 정부와 민간이 함께 기술보호 협력을 공고히 하고, 지속 가능한 혁신의 토대를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간 기업이 기술을 개발하고 수출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는 ‘기술 주권’을 지키기 위해 민·관이 함께 방어선을 세워야 한다는 공동의 위기의식이 공유된 셈이다.
한국은 지난 10년간 산업기술 유출 사건이 150건을 넘었고, 이 중 상당수가 반도체·디스플레이·바이오 등 국가핵심기술에 집중됐다. 유출 피해 금액은 조 단위에 달하며, 경쟁국이 이를 활용해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잠식한 사례도 적지 않다. 기술 탈취는 단순한 산업 손실이 아니라, 장기적인 산업 기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적 위협이다.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연설에서 “기술 확보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의무다. 정부는 기술보호 체계를 고도화하고, 민간과 협력하여 현장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법과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단지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보호 문화를 정착시키고, 법과 AI, 제도가 결합된 새로운 보호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기조가 뚜렷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흐름을 ‘기술 주권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필수 전략으로 본다.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개발하느냐만큼, 얼마나 철저히 지켜낼 수 있느냐가 산업 리더십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특히 AI, 양자기술, 우주항공, 수소 등 범용성과 파괴력이 큰 분야일수록 보안 체계는 산업 전략의 전제 조건이 된다.
‘기술은 공유해야 성장한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공유는 안전한 보호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번 산업기술보호의 날은 기술과 경제, 안보가 완전히 교차하는 시대를 선언하는 장이자, 한국이 기술패권 전쟁의 소극적 방어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보호자이자 설계자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킨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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