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을 맞이한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고환율, 고금리, 글로벌 통상 리스크 등 대외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기업들은 ‘확장’보다는 ‘유지’, ‘보수’보다는 ‘선택적 전진’을 택했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움츠러든 것은 아니다. 산업별·기업규모별로 온도차가 뚜렷하게 나타나면서, 우리 경제의 회복 궤적은 점차 분화되고 있다.
❚ 중견기업 절반 “올해도 투자한다”…설비·R&D·해외 진출에 집중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650개 중견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6년 중견기업 투자 전망 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46.9%가 올해 투자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투자 시기는 상반기(73.8%)와 하반기(67.9%) 모두 고르게 분포했으며, 이들 기업 중 83.6%는 전년 대비 투자 규모를 확대하거나 유지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특히 주력사업 확장(29.1%), 노후 설비 개선(22.0%), 신사업 진출(21.3%), 해외 시장 진출 확대(20.6%) 등이 주요 투자 동기로 꼽혔다. 투자 방식은 국내 설비 투자(78.7%)에 집중됐고, R&D(35.4%)와 해외 투자(19.3%)도 일정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중견기업이 단기 리스크를 넘어서 중장기 성장 모멘텀 확보를 위한 투자를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53.1%의 중견기업은 올해 투자를 계획하지 않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투자 불필요 업종’(34.2%)과 ‘불확실한 시장 상황’(28.7%)을 이유로 들었으며, 제조업 기업들은 ‘경영 실적 악화’와 ‘시장 불확실성’을 특히 많이 지적했다.
투자 재원으로는 내부 자금 활용(48.2%)이 가장 많았고, 금융권 차입(39.0%)과 정책 금융(5.7%)이 뒤를 이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중견기업들은 정책 당국에 대해 ‘법인세 인하’, ‘R&D 설비투자 세제 확대’, ‘내수 활성화’, ‘정책 금융 지원’ 등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 제조기업 10곳 중 8곳 “올해도 신중 모드”…업종별 양극화는 심화
전국 2,208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한 대한상공회의소의 ‘2026년 기업 경영 전망’ 조사에서도 신중 기조는 반복됐다. 올해 한국경제가 전년보다 더 둔화될 것이라고 본 기업은 40.1%, ‘작년과 비슷하다’는 응답은 36.3%, ‘개선될 것’이라는 낙관론은 23.6%에 그쳤다.
이 같은 경기 인식은 경영 전략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기업 79.4%는 ‘유지’ 또는 ‘축소’ 경영기조를 채택했으며, ‘확장 경영’을 선택한 기업은 20.6%에 불과했다. 이는 2023년 조사 당시 65.0%보다도 보수적인 경영 흐름이 확대된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산업별로는 분위기가 갈렸다. 반도체 산업의 경우 47.0%가 ‘확장 경영’을 선택했고, 화장품(39.4%)과 제약·바이오(39.5%) 업종도 평균보다 높은 확장 의지를 보였다. 반면 내수 침체와 글로벌 공급과잉이 겹친 섬유(20.0%), 철강(17.6%) 업종은 ‘축소 경영’ 비중이 가장 높았다.
올해 경영 계획 수립에 영향을 준 핵심 변수로는 ‘경기·수요 전망’(52.0%)과 ‘비용·수익성 구조’(25.9%)가 꼽혔으며, 정책·규제 환경(7.5%)과 대외 통상 리스크(7.0%)도 복합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 고환율이 가장 큰 위협…정책 기대는 ‘환율 안정’과 ‘투자 촉진’
기업들은 올해 한국경제의 가장 큰 리스크 요인으로 ‘고환율과 변동성’(47.3%)을 꼽았다. 이어 ‘유가 및 원자재 가격 불안정’(36.6%), ‘트럼프發 통상 불확실성’(35.9%), ‘글로벌 경기 둔화’(32.4%) 순으로 응답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정부에 가장 큰 기대를 거는 정책은 ‘환율 안정화 대책’(42.6%)이었으며, ‘국내투자 촉진’(40.2%), ‘통상 대응 강화’(39.0%), ‘소비 활성화’(30.4%) 등도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기업들은 이외에도 AI·첨단산업 육성, 위기산업 맞춤형 지원, 세제 개편과 규제 완화 등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정책 수단을 요구하고 있다.
❚ 신중함과 선택적 확장 사이…정책은 ‘속도와 방향’ 모두 중요
2026년 기업 경영의 핵심 키워드는 ‘신중함 속의 선별적 확장’이다. 전체적인 경제 환경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이 우세하지만, 산업별 성장 가능성과 기업 내재역량에 따라 선택적 투자와 확장 전략을 병행하는 양상이다.
강석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은 “수출과 내수의 동반 개선이 기대되지만, 산업별 회복 격차와 대외 불확실성에 따라 기업들의 경영기조는 신중함을 유지할 것”이라며 “정책 효과가 실질적인 성장 모멘텀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업종별 맞춤 지원과 과감한 규제 개선이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양균 중견련 정책본부장 역시 “여전히 절반 가까운 중견기업들이 투자 의지를 보이고 있는 만큼, 세제·금융 등 현장 수요를 반영한 전향적인 지원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올해 기업들은 ‘움직이되 무겁게’ 나아가고 있다. 그 발걸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정책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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