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화와 가명, 동전 던지기까지 동원해 인쇄용지 가격을 주무른 제지 업체들이 공정거래위원회의 매서운 칼날을 맞았다.

남동일 공정위 부위원장(브리핑 영상 캡쳐 이미지)
공정거래위원회는 23일 한솔제지, 무림에스피, 무림페이퍼, 무림피앤피, 한국제지, 홍원제지 등 인쇄용지 제조·판매사 6곳에 대해 가격 담합을 적발하고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3천383억 원을 부과했다고 발표했다.
남동일 공정위 부위원장은 정부세종청사 브리핑에서 “인쇄용지 가격 인상 폭과 시기를 공동으로 정한 행위에 대해 과징금 부과와 독자적 가격 재결정 명령을 의결했고, 한국제지·홍원제지 두 법인을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심의 결과에 따르면 제지사들은 2021년 2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정기·비정기 회합을 최소 60차례 이상 열어 인쇄용지 전 제품의 판매가격을 단계적으로 올리는 안을 논의했다. 대상 품목에는 교과서, 문제집, 단행본, 잡지, 화보 등에 쓰이는 백상지·아트지 등 일반 인쇄용지가 대부분 포함됐다. 국내 인쇄용지 시장에서 6개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국산 물량 기준 약 95%, 수입분을 포함해도 8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기준가격·할인율 조합해 7차례 가격 인상
가격 조정 방식은 기준가격 상향과 할인율 축소 두 축으로 나뉜다. 공정위 자료를 보면 2021년 3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거래처별 할인율을 15%포인트, 7%포인트씩 줄인 뒤, 같은 해 12월과 2022년 5월에는 기준가격 자체를 7%, 15%씩 올렸다. 이후 2022년 9월, 2023년 12월, 2024년 8월에는 할인율을 7~8%포인트 더 줄여 실거래가를 끌어올리는 구조가 이어졌다.
인쇄용지 판매가격은 ‘각 회사가 제시한 기준가격 × (1-할인율)’로 계산된다. 남 부위원장은 “기준가격은 한 번 올리면 잘 내려가지 않는 반면, 할인율은 개별 거래에서 협상 여지가 있다”며 “사업자들이 이 특성을 이용해 기준가격과 할인율을 번갈아 조정하며 실질 가격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공중전화·가명 사용…연락 경로까지 숨겨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은폐 정황도 구체적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일부 임직원은 가격 논의를 위해 연락할 때 자신의 휴대전화를 쓰지 않고 인근 공중전화나 식당 전화, 다른 부서 직원의 휴대전화를 빌려 사용했다. 경쟁사 담당자 연락처는 회사명을 그대로 쓰지 않고 이니셜·가명을 활용해 별도의 메모지에 적어 관리했다.
거래처에 가격 인상 계획을 먼저 알릴 순서도 사전에 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객사 반발이 최초 통보 업체에 집중되는 점을 의식해 순서를 합의했고, 이견이 생길 때는 동전이나 주사위를 던져 선·후순위를 정했다. 남 부위원장은 “연락 수단을 바꾸고 통보 순서조차 무작위 방식으로 정한 것은, 내부 관계자들이 스스로 행위의 위법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시장 점유율 95%…판매가격 평균 71% 상승
공정위는 담합 기간 동안 인쇄용지 판매가격이 평균 71% 오른 것으로 보고 있다. 남 부위원장은 “시장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업자들이 가격 인상을 공동으로 추진하면서 인쇄·출판업체 제작비 부담이 커졌고, 이는 교육비·도서 구입비 등 생활비 항목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구조”라고 평가했다.
다만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책값 인상 폭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서적 가격은 한 번에 크게 올리기 어렵기 때문에 출판·인쇄업계가 상당 부분 비용을 떠안은 것으로 보인다”며 “공정위 조사 범위에는 최종 소비자 가격 영향 분석이 포함되지 않았지만, 업계 탄원과 서명 제출 과정에서 비용 전가 문제를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과징금 규모 제지업계 최대…한국제지·홍원제지 검찰로
이번에 산정된 과징금 3천383억 원은 관련 매출액 약 4조 300억 원을 기준으로 책정됐다. 공정위는 무림 계열 3개사와 한국제지, 한솔제지에는 부과율 12%를 적용하고, 홍원제지에는 4%를 적용했다. 남 부위원장은 “담합 사건 전체를 통틀어 다섯 번째 규모의 제재액이고, 제지 기업만 놓고 보면 최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총 6개사 가운데 한국제지와 홍원제지는 검찰 수사를 받게 된다. 남 부위원장은 “고발 여부는 위반 내용, 관여 정도, 수행 역할 등을 함께 고려해 판단했다”며 “특정 회사의 관여 수준만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불황 카르텔 주장에는 “인가도 없고, 요건도 미충족”
심의 과정에서 일부 회사는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환율·해운비 상승 등으로 펄프·운송·에너지 비용이 크게 올랐다고 주장하며, 공정거래법상 불황 극복을 위한 공동행위 예외 조항을 언급했다. 그러나 공정위는 공동행위 인가 신청이 없었고, 내용상 산업 구조조정 목적 요건도 충족하지 못한다고 보고 예외 적용 가능성을 배제했다.
남 부위원장은 “제지 산업은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한 장치산업이고, 제품 차별성이 낮아 구조적으로 담합 유인이 큰 시장”이라면서도 “원가 부담이 컸다는 점과 별개로, 경쟁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가격 인상을 조율한 행위 자체는 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가격 재결정’ 명령…3년간 반기마다 보고
공정위는 금전 제재 외에 가격 구조를 다시 짜도록 요구하는 조치도 병행했다. 6개 회사는 국내에서 판매하는 인쇄용지 관련 품목의 기준가격과 할인율을 각각 독자적으로 다시 정하고, 그 결과를 향후 3년 동안 반기마다 공정위에 보고해야 한다.
남 부위원장은 “마지막 인상 합의 이후에도 모든 거래처에 적용되는 기준가격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담합 영향이 시장에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며 “기업이 스스로 경쟁 상황에 맞는 가격을 다시 설정하도록 요구하고, 보고 과정에서 결정 근거를 함께 검토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가격 재결정 명령은 2006년 밀가루 가격 담합 제재에 이어 20년 만에 두 번째로 내려진 조치다.
생활 밀접 담합 감시 강화 예고
공정위는 인쇄용지 시장에서 장기간 이어진 가격 담합 관행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남 부위원장은 “인쇄·출판·중소 유통업체의 비용 부담을 낮추고, 교육비와 도서 구입비 등 생활비 항목에 추가적인 압력이 발생하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국민 생활과 직결된 분야에서 유사한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감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전분당, 밀가루, 계란 등 식료품 관련 사건에 대해서도 심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법 위반이 확인되는 사안에는 예외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