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버가 해킹당해 고객 정보가 유출돼도, 판매자의 계정이 도용돼도 플랫폼은 책임지지 않는다. 국내 주요 오픈마켓이 오랜 기간 유지해 온 일방적 면책 특권이 전면 폐지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플랫폼의 시장 지배력에 비례하는 무거운 책임을 묻는 구조적 전환에 시동을 걸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쿠팡(Coupang), 네이버(Naver), 컬리(Kurly), 에스에스지닷컴(SSG.COM), 지마켓(Gmarket), 11번가(11st), 놀유니버스(Nol Universe) 등 7개 오픈마켓 사업자의 이용약관을 심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공정위는 개인정보보호 책임을 부당하게 전가하는 조항을 포함해 총 11개 유형의 불공정 약관을 시정했다고 밝혔다.
곽고은 공정위 약관특수거래과장은 “오픈마켓은 국민 생활에 필수적인 유통 채널이 된 만큼, 거래 과정에서 수집된 방대한 개인정보와 결제·환불·탈퇴 등 전 과정에서 사업자의 책임과 이용자의 권리 보호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며 “이번 조치는 플랫폼이 일방적으로 면책하던 약관을 바로잡아 입점업체와 소비자의 권익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곽고은 공정위 약관특수거래과장(e-브리핑 영상 캡처)
데이터 관리 책임의 주체 전환
가장 큰 변화는 개인정보 보호 책임의 재정렬이다. 그동안 일부 약관은 제3자의 불법 접속이나 악성코드 유포로 인한 피해 발생 시 회사와 임직원의 고의나 중과실이 없는 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명시해 왔다. 판매자가 로그인 정보를 타인에게 제공해 발생한 피해나, 특정 판매자가 처리하던 다른 회원의 개인정보가 침해된 경우에도 플랫폼은 책임이 없다는 문구가 포함돼 있었다.
공정위는 이런 조항들을 보안 위험을 이용자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기는 부당 행위로 판단했다. 곽 과장은 “개인정보처리자가 무과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책임을 면할 수 없도록 한 개인정보보호법의 원칙을 약관에도 반영하도록 한 것”이라며 “플랫폼이 법상 져야 할 책임을 약관으로 피하는 구조를 손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관련 조항은 전면 삭제되거나, 사고 발생 시 사업자 귀책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도록 수정된다.
통신판매 중개자라는 이유만으로 배상 책임을 회피하던 관행도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그동안 일부 오픈마켓은 “전시 수단만 제공할 뿐, 상담·가입·납입 등에 관여하지 않으며 어떠한 책임도 부담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중개 책임을 폭넓게 부인해 왔다. 공정위는 중개 서비스 제공자로서 플랫폼도 고의·과실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결제·정산 주도권, 이용자에게 반환
사업자 편의에 맞춰 설계된 결제와 정산 구조도 대대적으로 손질된다. 쿠팡은 그동안 지정한 수단으로 결제가 실패할 경우 회사가 정한 정책에 따라 다른 수단으로 자동 청구할 수 있도록 약관을 운영해 왔다. 공정위는 결제 수단과 우선순위를 정하는 권한이 소비자에게 있다는 점을 들어, 이용자가 등록·보유한 결제수단 가운데 본인이 지정한 순서대로만 결제가 이뤄지도록 약관을 바로잡았다.
입점업체의 판매대금 정산을 광범위한 사유로 보류하던 규정도 구체적이고 예측 가능한 요건으로 축소된다. 일부 플랫폼은 신용카드 부당 사용 여부 확인, 판매자·소비자 간 분쟁, 계약 종료 후 발생할 수 있는 클레임 등을 이유로, 분쟁이 끝날 때까지 대금 환급이나 정산을 미루고 이 기간 이자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규정해 왔다. 공정위는 정산 보류가 입점업체의 권리와 자금 흐름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불가피한 경우로 한정하고 보류 사유를 명확히 적시하도록 약관을 시정했다.
소비자 권리도 대폭 강화된다. 회원 탈퇴 시 현금으로 충전한 유상 캐시까지 일괄 소멸시키던 조항은 폐지되고, 유상 캐시 잔액을 반환하도록 약관이 바뀐다. 공정위는 현금·카드로 충전한 전자지급수단을 이용자가 비용을 지불하고 취득한 재산적 가치로 보고, 계약 해지 시 잔액을 돌려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월·연 단위 구독 서비스에서 결제 주기에 따라 환불 기준을 다르게 적용해 연회원에게 사실상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던 조항도 삭제된다. 손해배상 상한액을 일률적으로 10만 원으로 제한하던 조항 역시 사라져, 플랫폼이 중개서비스 관리 의무를 위반해 손해를 발생시킨 경우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당한 배상을 하도록 구조가 정비된다.
운영정책·약관 개정·재판 관할…사업자 편향 구조 손질
약관보다 운영정책을 우선시하거나, 분쟁 관할을 사업자에게 유리하게만 정한 조항도 손질 대상이다. 일부 사업자는 세부 운영정책과 지침을 “본 약관과 더불어 이용계약의 일부를 구성하며, 운영정책과 약관이 상충하는 경우 운영정책이 우선한다”고 규정해, 사업자가 수시로 변경하는 내부 정책으로 약관 내용을 사실상 대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뒀다. 공정위는 운영정책이 약관을 보완하는 집행 규정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운영정책이 약관보다 우선한다는 문구를 삭제하도록 했다.
약관 개정 절차도 정비된다. 과거에는 홈페이지 공지 후 일정 기간 이의 제기가 없으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상당한 기간’이 얼마인지, 어떤 변경이 개별 통지 대상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리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앞으로는 권리·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개정 사항에 대해서는 개별 통지를 하고, 묵시적 동의를 인정하더라도 기간과 절차를 구체적으로 안내하도록 약관을 고치게 된다.
분쟁 발생 시 사업자 본사 소재지를 전속 관할로 지정하던 조항도 수정된다. 공정위는 재판 관할은 당사자 편의와 재판 사무의 공평한 분배를 고려해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합의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민사소송법상 일반 관할 규정에 맞게 관할 법원을 정하도록 시정했다.
플랫폼 책임 시대 개막…“수익·통제권에 상응하는 책임”
7개 사업자는 공정위 요구를 수용해 5월 초까지 약관 개정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공정위는 시정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거나 동일 유형의 불공정 약관이 반복될 경우, 시정명령과 검찰 고발 등 강력한 제재 수단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번 약관 시정을 단순한 규정 정비가 아닌 전자상거래 시장의 권력 지형 변화로 해석한다. 플랫폼이 중개 수익과 데이터·결제 통제권을 누리면서도, 각종 리스크는 약관을 통해 회피하던 구조가 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데이터 관리부터 결제와 정산에 이르기까지, 플랫폼의 통제력과 시장 지배력에 상응하는 책임을 요구하는 새로운 표준이 자리 잡는 출발점이라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