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를 넘나들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하는 가운데, 한국 제조업은 이미 '고환율=수출 호재'라는 오래된 통념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라는 진단이 잇따르고 있다. 산업연구원(KIET)이 최근 발표한 ‘고환율기 수입 구조의 산업별 비대칭성과 정책 대응 방향’ 보고서는 이 구조적 변화를 가장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다.
이 보고서와 최근 관련 연구·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고환율은 산업별로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나고 있으며, 한국 제조업의 취약한 수입 구조가 일부 전략산업을 정면으로 압박하는 양상이 뚜렷하다.
고환율·고유가의 ‘복합 비용 충격’…교과서 공식은 깨졌다
산업연구원은 이번 고환율 국면을 '고환율과 고유가가 동시에 구조화된 복합 비용 충격'으로 규정한다.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에 진입한 상황에서 국제 유가까지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수입 원자재와 에너지 비용이 동시에 상승해 기업의 비용 인플레이션 압력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환율 상승은 한 손으로는 수입 비용을 높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수출 가격 경쟁력을 개선하는 두 가지 경로로 작동한다. 그러나 한국 제조업은 수입 중간재 의존도가 높은 구조라, 수입 비용 상승이 곧바로 수출 원가를 끌어올리면서 환율의 ‘수출 호재’ 효과를 상당 부분 상쇄시키는 것으로 분석된다. 매일경제 역시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고환율=수출 호재’ 공식은 이미 깨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 에너지 가격까지 상승하면서, 정유·석유화학·운송뿐 아니라 전력요금 인상 압력으로 전 산업의 공장 가동비가 늘어나는 전형적인 비용 인플레이션 환경이 형성되고 있다.
수입조정형 vs 수입유지형…같은 환율, 다른 충격
보고서의 핵심은 환율 충격에 대한 수입 구조의 반응이 산업별로 비대칭적이라는 점을 계량적으로 보여줬다는 데 있다. 연구진(김태훈·홍성욱·한정민 부연구위원 등)은 수입물량 탄력성을 기준으로 산업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 물량을 줄이거나 조정할 수 있는 수입조정형과 환율이 올라가도 수입을 줄이기 어려운, 사실상 비탄력적 산업인 수입유지형이다.
가전·자동차부품·자동차 등은 대표적인 수입조정형 산업으로 분류된다. 이들 산업은 수입 부품과 완성품을 국내 생산으로 대체할 수 있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환율 상승기에 수입량을 줄이고 국내 생산을 늘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가전·자동차의 경우 수입물량 탄력성의 상당 부분이 최종재(완성품) 수입 감소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환율 상승으로 해외 브랜드 완성품 가격 경쟁력이 떨어질 때 국내 생산품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지는 ‘수입대체 효과’를 의미한다.
반대로 반도체·원유 관련 산업·이차전지는 수입유지형 산업으로 나타났다. 이들 산업은 고환율에도 수입 규모가 유지되거나 오히려 확대되는 구조를 보인다.
반도체 소재·장비는 소수 글로벌 공급사와의 사실상 독점적 거래 구조로 대체 가능성이 매우 낮아, 환율 상승분이 조달 비용에 그대로 전이된다. 원유·에너지의 경우 국제 가격과 환율이라는 ‘이중 변수’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전형적인 비(非)조정형 수입 품목이다. 이차전지(배터리) 역시 핵심 소재와 설비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는 전략산업으로, 환율 상승이 투자·생산비 부담을 직접적으로 확대한다.
산업연은 '수입유지형 산업의 경우, 고환율이 장기화되면 조달 비용 누적→수익성 악화→설비투자 축소 및 생산성 저하 → 산업 경쟁력 약화라는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반도체와 이차전지는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의 최전선에 있는 전략산업인 만큼, 고환율로 인한 수익성 악화가 투자 연속성 훼손으로 이어질 경우 중장기 산업 경쟁력에 치명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수입 감소’도 두 얼굴…제조업이 마주한 딜레마
주목해야 할 대목은,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수입 감소’라도 수입조정형 산업에서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 물량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지만, 이를 곧바로 “국산이 살아난다”는 긍정 신호로만 읽는 것은 위험하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이 수입 감소를 크게 두 가지 경로로 나눠 해석한다. 첫 번째는 이른바 ‘수입대체 경로’다. 환율이 상승하면 해외에서 들여오는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가격 매력이 높아진다. 이 경우 기업은 완성품이나 일부 부품을 해외 대신 국내에서 조달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국내 생산 비중이 높아지면서 제조 기반을 강화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수입이 줄어든 자리를 국산이 메우는 만큼, 고환율을 계기로 국내 생산 생태계가 일부 회복될 수 있다는 기대가 가능한 구간이다.
하지만 두 번째 경로인 ‘중간재 비용 부담 경로’는 정반대의 그림을 보여준다. 한국 제조업은 핵심 부품·소재와 장비를 해외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환율이 오르면 필수적인 수입 원가부터 껑충 뛴다. 수입 물량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비싸진 중간재를 최소한으로만 들여오느라 생산량을 줄이거나 투자 계획을 접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과정에서 생산 비용은 오르고, 이익과 투자 여력은 줄어들며, 장기적으로는 제조 기반이 약해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같은 ‘수입 감소’라는 숫자를 놓고도, 어떤 산업에서는 공장 가동률과 국산 부품 비중이 높아지는 제조 회복의 신호일 수 있지만, 다른 산업에서는 생산 축소와 설비투자 위축의 전조일 수 있다. 수입조정형 산업을 읽을 때, 정책과 시장 모두가 “수입이 줄었다”는 결과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수입대체와 비용 부담 중 어느 경로가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두 경로 중 어느 쪽 효과가 지배적인지는 해당 산업이 어떤 품목을 어떤 용도로 수입하는지, 즉 수입 품목 구성에 의해 결정된다. 최종재·소비재 비중이 크면 고환율이 국산 대체의 기회가 될 수 있지만, 핵심 중간재·장비 비중이 높으면 고환율은 ‘제조업 리쇼어링’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 축소와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대목은 한국 제조업의 구조적 취약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국회에 제출한 ‘원·달러 환율 상승에 따른 산업별 생산비 영향’ 분석에 따르면, 환율이 2023년 평균 1,305.9원에서 1,486.7원(약 13.8% 상승)으로 올랐을 때 국내 제조업 생산비는 평균 6.13% 증가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한경비즈니스는 후속 기사에서 '환율이 1,500원까지 상승하면 전체 산업 생산비는 약 4.4~6% 추가 상승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즉, 수입대체 여지가 있는 일부 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제조업에 고환율은 이미 ‘비용 폭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장 체감_‘호재’보다 ‘청구서’…특히 약한 고리, 중소 제조업
대기업 수출주 일부는 여전히 환율 상승의 긍정적 측면을 누리고 있다. 삼성전자·현대차 등 달러 매출 비중이 높은 기업들은 매출과 영업이익에 일정 부분 플러스 효과를 보고 있다는 증권가 분석이 이어진다.
그러나 제조업 전반, 특히 중소기업 층에서는 고환율이 ‘호재’보다는 ‘청구서’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난다.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연구에서, 환율 변동이 중소 제조기업의 재무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상당수 기업이 환율 변동에 매우 민감하지만, 환헤지 등 위험 관리 수단을 보유한 기업은 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산업종합저널이 2025년 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중소기업 10곳 중 4곳 이상이 고환율로 피해를 보고 있다고 응답했고, 수혜를 봤다는 기업은 10%대에 그쳤다. 응답 기업의 다수는 원부자재 수입 가격과 외화 결제 부담, 물류비 상승을 주요 부담 요인으로 꼽았으며, 환율 상승분을 최종 제품 가격에 충분히 전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처럼 고환율 환경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입조정형 산업과 수입유지형 산업 간의 ‘체감 온도 차’는 앞으로도 한국 제조업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잠재 요인으로 지목된다.
KIET 보고서가 던지는 메시지는 한 줄로 요약하면 “환율은 숫자가 아니라 ‘산업별 구조’로 봐야 산다”에 가깝다. 같은 1,500원대 원·달러 환율이라도, 어떤 업종에는 숨통을 트이게 하는 기회가 되고, 다른 업종에는 설비투자와 기술격차를 잠식하는 리스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은 이 지점을 짚으며, 환율 정책과 산업 정책 모두를 ‘산업별 맞춤형’으로 다시 짜야 한다고 강조한다.
보고서는 먼저 가전·자동차·부품 등 이른바 수입조정형 산업을 겨냥해 “환율 상승기에 나타나는 수입대체 효과를 국내 생산 확대와 공급망 재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환율이 오르면 해외 완성품과 부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국내 생산품이 유리해지는 만큼, 이 시기를 활용해 국산 부품 채택을 늘리고 국내 생산 인프라를 보강하라는 메시지다. 다만 이 과정에서 핵심 중간재까지 일괄적으로 비싸지면, 제조 회복 효과가 비용 폭탄에 묻혀 버릴 수 있다는 점도 경고한다. 따라서 필수 중간재에 대해서만큼은 관세 인하, 세제 지원, 정책금융을 통해 원가 부담을 낮춰, 수입대체의 긍정적인 효과가 실제 투자와 고용 확대로 이어지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게 산업연의 제안이다.
반면 반도체·이차전지·에너지와 같은 수입유지형·전략산업에 대해서는 접근법이 완전히 다르다. 이들 산업은 환율이 오르더라도 수입을 줄이거나 조달처를 바꾸기 어렵고, 환율 충격이 곧바로 조달 비용에 켜켜이 쌓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고환율이 장기화될 경우 수익성 악화가 설비투자 축소와 생산성 저하로 이어져, 결국 산업 경쟁력 약화라는 악순환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하며, 환율변동보험 현실화, 세제 완화, 정책금융 확대 등을 통해 이들 전략산업의 투자 연속성을 지키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강조한다. 단기 환율 방어도 중요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소재·장비 국산화와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이 구조 자체를 ‘완전 수입유지형’에서 점진적으로 완화하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는 점도 빼놓지 않는다.
결국 KIET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환율을 두고 “전체 수출에 득이냐 실이냐”를 따지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각 산업의 수입 구조와 공급망, 투자 사이클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그에 맞는 다른 해법을 준비하지 않으면, 같은 환율이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비용으로 작동하는 양극화만 심해질 것이라는 경고다.
중장기적으로는 소재·장비 국산화와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산업 구조를 ‘완전 수입유지형’에서 최소한 ‘부분 수입조정형’으로 전환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산업연 홍성욱 실장은 이미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산업 전반에 걸쳐 산업별 수입 물가·물량에 대한 실시간 모니터링 기반의 조기경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며, '중소·중견기업의 환헤지 상품 접근성을 높이고 실효성 있는 환위험 관리 컨설팅을 제공하는 등 환위험 관리 역량 강화가 시급하다'고도 지적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26년 초 발표한 ‘기업이 바라본 2026 경제·경영 전망’ 조사에서도, 기업들이 정부에 가장 기대하는 정책 과제로 ‘환율 안정화 정책’을 첫손에 꼽은 바 있다. 이는 고환율 문제가 개별 기업의 경영 변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조업 생태계 전반의 지속 가능성을 가르는 거시 리스크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향후 환율의 방향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분명해진 현실은 하나다. 환율 변동성이 상시화된 ‘환율의 시대’에는 환율을 더 이상 일시적인 외부 충격이 아니라, 기업의 재무 전략과 투자 전략을 설계하는 기본 변수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산업연구원이 ‘환율 변동이 국내 제조업 기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별도로 분석하면서 “환율을 기업 성과의 핵심 결정 요인으로 내재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제조업이 마주한 과제는 크게 세 축으로 정리된다. 먼저, 산업별·기업 규모별로 서로 다른 ‘환율 쇼크 흡수 능력’을 전제로 한 맞춤형 정책 디자인이다. 같은 10% 환율 상승이라도 반도체·배터리처럼 수입유지형 구조에 묶인 전략산업과, 가전·자동차처럼 수입조정형 특성이 강한 산업의 충격 강도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책 당국은 원·달러 평균 수준만 보며 일괄 대응하기보다, 업종·규모별로 어느 정도의 환율 수준과 변동성이 ‘견딜 수 있는 범위’인지 정교하게 진단하고, 세제·관세·정책금융 수단을 차등 설계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반도체·배터리·에너지와 같은 전략산업의 ‘수입유지형’ 구조를 단계적으로 풀어내는 공급망 재편이다. 산업연 보고서가 지적하듯, 이들 산업은 환율이 오르더라도 수입을 줄이기 어렵고, 충격이 고스란히 설비투자와 생산성에 전이되는 구조다. 단기적으로는 환율변동보험, 세액공제, 정책금융을 통해 투자 연속성을 지키는 안전판이 필요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소재·장비 국산화와 공급국 다변화를 통해 “환율이 급등해도 전량 수입에 묶여 있는 구조” 자체를 완화하는 전략이 병행돼야 한다.
마지막은 고환율 환경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로 지목되는 중소·중견 제조기업의 환위험 관리 역량을 끌어올리는 금융·컨설팅 인프라 구축이다. 중소벤처기업부와 관련 연구에 따르면, 상당수 중소 제조기업이 환율 변동에 매우 민감하지만, 실제로 선물환·환변동보험 등 헤지 수단을 활용하는 비율은 여전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선물환 보험료 인하, 가입 인센티브 제공, 무역보험공사·민간은행과의 연계를 통한 패키지 상품 확대 등 정책적 장치는 이미 일부 도입돼 있지만, 이를 “실제로 쓸 수 있는 도구”로 만드는 현장형 컨설팅과 교육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결국 원·달러 1,500원대라는 숫자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이 환율 수준이 한국 제조업의 구조 속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비용과 투자, 고용과 생산성에 전이되고 있는지다. 산업연과 KDI, 무역협회 등이 잇따라 내놓는 분석의 공통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제는 환율이 오르느냐 내리느냐를 두고 “호재냐 악재냐”를 단순히 따지는 것을 넘어, “어떤 산업의 어떤 수입 구조에, 어떤 기업의 재무 구조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으면, 정책도 기업 전략도 방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