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 열풍이 반도체 장비 시장을 본격적인 슈퍼사이클로 끌어올리고 있다. SEMI의 ‘전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 통계(WWSEMS)’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글로벌 반도체 장비 매출은 365억5,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4% 증가하며 분기 기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직전 분기와 비교해도 1% 늘어, AI 인프라 투자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추세로 굳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역별로는 중국이 109억9,000만 달러로 1위를 유지했고, 한국(89억3,000만 달러)과 대만(87억7,000만 달러)이 뒤를 이었다. 미국과 유럽·동남아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첨단 메모리와 파운드리 생산능력을 앞세운 동아시아 3국이 AI 관련 장비 수요를 사실상 주도하는 구도가 재확인된 셈이다.
이번 실적의 중심에는 AI 서버용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있다. WWSEMS 자료와 업계 분석에 따르면, 최첨단 로직, DRAM, HBM 및 첨단 패키징 라인 증설과 공정 업그레이드가 장비 발주를 견인했다. 파운드리의 3나노 이하 공정 전환, HBM 적층을 위한 TSV·본더 장비, 고집적 패키징 설비 등에서 동시에 수요가 커지면서, 과거처럼 메모리·비메모리가 번갈아 사이클을 주도하던 국면과는 결이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SEMI는 이번 실적을 두고, AI가 이끄는 반도체 성장세를 뒷받침하기 위한 생산능력과 인프라 투자가 계속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1분기 기준 역대 최대 장비 매출은 첨단 공정 제조와 첨단 패키징 투자 모멘텀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라는 설명도 더했다.
한국 입장에서 의미 있는 대목은 ‘메모리 중심 투자’의 복귀다. SEMI와 주요 증권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장비 지출은 2026년에 약 300억 달러 안팎까지 늘어 중국·대만을 추격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4, 저전력 서버 DRAM, 첨단 낸드 양산을 위해 평택·용인 등 국내 거점과 미국·동남아 신규 라인에 공격적으로 투자를 재개하면서, 노광·식각·증착·검사·패키징 장비 수요가 동반 확대될 것이란 관측이다.
중기적으로도 AI발(發) 장비 수요는 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SEMI의 300mm 팹 설비투자 전망에 따르면, 전 세계 300mm 팹 장비 투자는 2026~2028년 3년간 3,74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간 기준으로는 2026년 1,160억~1,160억 달러, 2027년 1,200억 달러, 2028년 1,380억 달러 수준으로 단계적 증가가 예상되며, AI 데이터센터와 엣지 디바이스용 고성능 칩이 주요 수요처로 지목된다.
국내 장비 업체들은 이미 HBM·첨단 패키징 관련 포트폴리오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부 후공정 장비사는 HBM용 열압착 본더, 패키지 검사·리페어 장비를 앞세워 2026년 이후 양산 라인 채택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노광·식각·증착 장비 공급사들도 AI용 로직·메모리 공정을 겨냥한 신규 장비 인증과 레퍼런스 확보에 나선 상태다. 1분기 WWSEMS 지표는 이러한 움직임이 단기 이벤트가 아니라, AI 인프라 확장을 전제로 한 중장기 설비투자 사이클의 초입에 가깝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다만, 업계에서는 AI 호황이 모든 장비사에 동일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경고도 나온다. 선단 공정·HBM 중심 투자로 자본이 집중되면서, 레거시 노드·범용 메모리용 장비 수요는 상대적으로 회복 속도가 더디고, 일부 세그먼트에서는 구조조정 가능성도 제기된다. 또, 중국의 자급률 제고 정책과 미국·유럽의 공급망 재편 정책이 중첩되면서, 특정 장비·부품에 대한 수출 통제나 현지화 요구가 강화될 경우 한국 기업들의 투자 회수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리스크도 상존한다.
그럼에도 2026년 1분기 수치는 ‘AI 인프라 투자가 실제 설비 발주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3년간 3,000억 달러를 넘는 300mm 팹 장비 투자가 예고된 상황에서, 한국의 메모리·후공정 경쟁력이 유지된다면, 국내 장비·소재 업체들이 AI 슈퍼사이클의 구조적 수혜를 누릴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