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산업용 전기요금을 지역별로 달리 적용하는 설계안을 내놓자 경제계가 환영 입장을 냈다. 전력이 풍부한 비수도권의 요금 부담을 낮춰 기업 투자와 전력 수요를 지방으로 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경제계는 전기료 인하만으로 지역 투자가 따라오기는 어렵다며 규제 혁신과 인프라 확충, 정주 여건 개선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경제인협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산업단체 21곳은 26일 공동성명을 내고 정부의 ‘산업용 지역 전기요금제’ 도입 방안을 환영했다. 철강·석유화학·기계·디스플레이·반도체·배터리·자동차·조선 등 주요 제조업 단체들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전기는 지방서 만들고 수요는 수도권에 몰리고
공동성명은 AI와 첨단산업 성장으로 전력 수요가 늘어나는 가운데 수도권 수요 집중과 송전망 구축 지연으로 국가 전력수급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경제계는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으로 기업 경쟁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요금체계 개편이 비용 부담을 낮추고 기업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고 봤다.
발전은 비수도권에 많이 분포하지만 수요는 수도권에 몰려 있다. 정부는 이 같은 구조가 장거리 송전과 계통 부담을 키운다고 보고, 전력 수요를 발전지역 가까이 분산하는 방향으로 요금체계를 손보려 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와 한국전력공사는 26일 공청회에서 산업용 전기요금에 ‘지역별 조정요금’을 신설하는 설계안을 공개했다. 공청회 의견을 수렴해 최종안을 마련하고 고시와 전기요금 약관 개정 절차를 거쳐 연내 도입하는 것이 목표다.
11개 권역의 차등요금 설계
설계안은 전력계통을 기준으로 수도권 남부·수도권 북부·중부권·남부권 등 4개 광역권을 나누고, 지방우대지수와 산업위기지역 등 균형성장 요소를 함께 반영해 11개 지역으로 세분화하는 방식이다.
수도권 남부는 현행 수준과 같거나 kWh당 1원 안팎만 조정된다. 수도권 북부는 최대 약 10원, 중부권은 최대 약 15원, 남부권은 최대 18원까지 낮아진다. 남부권 최대 인하 폭은 지난해 산업용 전기 평균 판매단가의 약 10% 수준이다.
정부는 설계안이 시행되면 산업용 전기요금 부담이 약 2조8,000억 원 줄어들 것으로 추산했다. 다만 최종 권역 구분과 세부 요금 산정에 따라 절감 규모는 달라질 수 있다.
전기료 넘어선 산업입지 경쟁
요금 차등은 제조업 원가를 넘어 기업의 신규 투자와 생산시설 입지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철강·석유화학·시멘트·비철금속처럼 전력 사용량이 많은 업종일수록 인하 폭이 생산비와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도 커질 수 있다.
포항·광양의 철강, 울산·여수의 석유화학처럼 남부권에 생산거점을 둔 기업은 상대적으로 큰 인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용인·평택·이천 등 수도권 남부에 위치한 생산시설은 요금 변화가 크지 않을 전망이다.
지역요금제는 모든 기업에 똑같은 혜택을 주는 지원책이라기보다 전력 다소비 업종의 비수도권 투자 여건을 개선하려는 산업입지 정책의 성격이 짙다. 발전지역 인근에 수요를 유도해 송전망 부담을 줄이고 지방 제조 기반을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경제계는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으로 기업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도입 방안이 생산비 경감과 투자 촉진, 지역균형발전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전기요금이 생산과 투자 활동에 직접 연결되는 만큼 요금 인하 효과가 현장에 빨리 나타날 수 있도록 조속한 시행도 요구했다.
요금 인하 이후의 과제
공동성명은 요금 차등만으로 지방 투자 확대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점도 짚었다. 경제계는 메가프로젝트 성공과 국가전략산업 육성으로 효과를 이어가려면 규제 혁신, 정주 여건 지원, 인프라 확충 등 균형발전 정책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전기료가 낮아져도 인력과 기반시설, 전력 공급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업의 지방 투자는 제한적일 수 있다. 산업계가 요금 인하와 별개로 인프라 확충과 정주 지원을 요구한 배경이다.
정부가 공청회 의견을 반영해 요금 산정 기준과 권역 구분을 확정하는 과정에서는 인하 폭과 재원, 한국전력의 재무 영향 등을 놓고 이해관계자 논의도 이어질 전망이다. 정부는 재정 지원과 도매가격 체계 개선을 통해 한전의 재무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소매요금 차등과 도매시장 지역가격제
정부는 산업용 소매요금 차등과 함께 전력시장 도매가격에도 지역별 가격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발전사와 한전 등이 거래하는 전력시장을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눠 각각 다른 가격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소매요금 차등은 전기를 쓰는 기업에 적용되고, 도매시장 지역가격제는 발전·송전 여건에 따라 전력 거래 가격을 달리하는 구조다. 정부는 두 방안을 함께 추진해 전력이 생산되는 곳과 소비되는 곳의 거리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가격 신호에 반영하겠다는 구상이다.
경제계는 지역요금제가 분산에너지 활성화와 산업경쟁력, 지역균형성장을 함께 뒷받침하는 정책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했다. 향후 관건은 요금 차등이라는 가격 신호가 실제 기업의 투자와 입지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