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술개발의 속도와 연구자의 노동시간을 둘러싼 논쟁이 초광역특구법으로 옮겨붙었다. 산업계는 개발 일정에 맞춰 연구인력의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계는 규제 완화가 장시간 노동과 고용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역 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특별법이 기업의 투자 여건뿐 아니라 노동자의 근로조건까지 바꾸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선이 엇갈린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2일 입장문을 내고 노동 특례를 포함한 ‘지방주도성장을 위한 초광역권전략산업특구 지정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안’ 발의를 환영하며 조속한 국회 통과를 촉구했다.
협회가 강조한 것은 반도체 연구개발(R&D)의 업무 특성이다. 설계와 검증, 수율 개선 등 특정 단계에 업무가 집중되지만 현행 제도로는 개발 일정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연구의 연속성을 확보하려면 근로시간 운용에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쟁점은 반도체 연구인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특별법에는 연구개발 인력의 근로시간뿐 아니라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과 기간제 근로자 사용기간에 관한 특례도 담겼다.
지난해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 보완…최대 6개월 허용
반도체 연구개발 분야에서는 지난해부터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를 보완해 운영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2025년 3월 14일 ‘반도체 연구개발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 업무처리 지침’을 시행했다. 기업은 1회 최대 3개월인 일반 인가와 최대 6개월인 특례 인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신청할 수 있다.
특례 인가를 받으면 첫 3개월은 주 총근로시간 64시간 이내, 이후 인가기간은 60시간 이내에서 운영할 수 있다. 별도 심사를 거쳐 인가받는 방식으로, 연구인력 전체에 근로시간 예외를 일괄 적용한 것은 아니다.
초광역특구법은 이러한 행정지침과 달리 지역 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특별법에 노동 관련 규제 완화 근거를 담는 방안이다.
같은 이름의 법안 두 건…노동 특례 포함 여부 갈려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0월 20일 ‘지방주도성장을 위한 초광역권전략산업특구 지정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여러 지방자치단체를 광역 경제권으로 연결해 전략산업을 육성하고 기업투자를 유치하는 내용이다. 규제 특례와 재정·금융·세제 지원을 비롯해 노동 관련 특례도 포함했다.
다음 날인 21일에는 최기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노동 특례를 제외한 같은 이름의 법안을 별도로 발의했다.
최 의원 법안에서는 고소득 연구직 등에 대한 주 52시간제 예외와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 확대, 기간제 근로자 사용기간 확대 조항이 빠졌다. 산업경쟁력 강화와 노동자 권리 보호를 함께 고려해야 하며 사회적 숙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두 법안은 지역 전략산업 지원이라는 목표를 공유하지만 노동 관련 규제를 어디까지 완화할지를 놓고 차이를 보인다.
정부, 320여 개 규제 특례 구상…노사정 대화도 진행
정부는 지난 10월 23일 초광역특구법 제정 추진 방향을 발표했다. 320여 개의 규제 특례와 정책 지원을 결합해 지역 전략산업 육성과 기업투자를 뒷받침하겠다는 구상이다. 2027년 상반기 권역별 초광역특구 지정을 목표로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2일 노사와 관계부처가 참여한 ‘초광역특구법 관련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 제1차 차관급 운영협의체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앞선 여섯 차례 실무협의에서 제시된 노동정책 제안을 토대로 향후 다룰 의제와 순서를 정했다. 기본목표와 정주지원·인력양성에 이어 산업안전·보건과 노동시간·건강권, 고용형태·노동자 보호, 노사관계·참여 등을 논의하기로 했다.
제7차 실무협의체는 오는 6일 오전 9시 30분 열린다. 노사정이 협의할 의제는 정했지만 노동 특례 도입이나 적용 기준에 합의한 것은 아니다.
산업계는 개발 효율 기대…노동계는 건강권 우려
반도체협회는 연구개발 업무가 몰리는 시기에 핵심 연구인력의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하면 개발의 연속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차세대 기술 선점과 초광역특구의 반도체 혁신 거점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근로시간 규제 완화와 비정규직 사용 확대가 노동자의 권리를 약화할 수 있다며 반대했다. 사회적 대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관련 조항을 먼저 법안에 포함한 절차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반도체협회는 초과근로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 체계와 건강권 보호 방안을 산업계와 함께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산업계가 요구하는 기술개발의 속도와 노동계가 강조하는 근로조건 보호 사이에서 국회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특례를 도입할 경우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적용할지, 늘어나는 노동시간에 대한 보상과 건강보호 장치를 어떻게 마련할지가 향후 심사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