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기 집권과 동시에 세계 경제의 가장 예민한 신경계인 ‘환율’을 협상 테이블 중앙에 올렸다. 지난 7월 31일 국가별 상호관세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무역 패권주의의 포문을 연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 관세라는 장벽을 넘어 통화 가치라는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985년 일본 제조업의 심장을 멈추게 했던 플라자 합의를 모델로 한 이른바 ‘마러라고 합의(Mar-a-Lago Accord)’ 구상은 우리 경제에 단순한 환율 변동을 넘어선 구조적 쇼크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 제조업 부활의 제물 된 환율… 안보와 맞바꾼 ‘달러 약세’
스티븐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 제시한 마러라고 합의의 본질은 냉혹한 거래에 가깝다. 미국의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와 제조업 쇠퇴의 원인을 달러 고평가로 규정하고, 관세와 안보 보장을 지렛대 삼아 주요국의 통화 가치를 강제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의 안보 우산이 필요한 국가일수록 통화 가치를 절상하라는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다.
물론 40년 전과는 시장 환경이 판이하다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외환시장 규모가 1985년 대비 6배나 팽창했고 미국 국채의 57%를 민간이 보유하고 있어, 정부 주도의 인위적 개입이 시장에 미칠 파급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시장이 정작 긴장하는 대목은 합의의 현실화 여부보다 미국이 개별 국가를 향해 상시적으로 휘두를 통화 절상 압박 그 자체다. 이는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가장 치명적인 자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출 경쟁력 잠식하는 원화 절상… 변동성 1%p에 수출 1.5% 증발
한국무역협회(KITA)가 최근 분석한 트럼프 2기 달러 약세 시나리오는 우리 제조 현장에 서늘한 경고를 던진다. 원/달러 환율이 10% 하락(원화 가치 절상)할 경우, 우리 수출은 즉각적으로 0.25% 감소하고 수입은 1.31%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출 기업들은 원화 수익성을 보전하기 위해 달러 기준 수출 가격 인상을 시도하겠지만,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판매 물량 급감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가격의 수준보다 널뛰기 그 자체에 있다. 분석 결과 환율 변동성이 1%포인트 확대될 때마다 우리 수출 물량은 1.54%씩 허공으로 증발한다. 불확실성이 증폭되면 기업들은 수출 계약을 지연시키고 환헤지 비용 폭증에 따른 재무적 타격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어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될 수밖에 없다.
수입 원가 절감의 빛과 그림자… 업종별 희비 엇갈려
반면 수입 원자재 가격 하락에 따른 긍정적 측면도 공존한다. 환율이 10% 떨어지면 제조업 전반에서 평균 4.4%의 원가 하락 요인이 발생한다.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절대적인 석탄 및 석유제품은 7.2%, 1차 금속제품은 6.0%의 생산 비용 절감 효과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제조업 평균 생산 비용 역시 3.0%가량 줄어들어 수익 구조 개선에 기여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원가 절감의 이득이 수출 물량 감소에 따른 실익의 훼손을 온전히 상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현장의 중론이다.
구조적 체질 개선이 유일한 방패… ‘환율 체질’ 혁신해야
양지원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설령 마러라고 합의가 서명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미국의 통화 절상 압박은 멈추지 않는 상수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정부 차원의 통화스와프 확대와 외환 방어막 강화는 물론, 수출 기업에 대한 환헤지 지원과 맞춤형 금융 카드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원화 강세가 고착화될 경우 미국 바이어들의 단가 인하 압력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자동화와 디지털 전환 투자를 통해 근본적인 원가 구조를 혁신하는 동시에, 미국 현지 조달 및 생산 체계를 재편하여 환노출 자체를 줄이는 전략적 대응이 필수적이다. 환율이 경제 지표를 넘어 생존의 무기로 진화한 트럼프 시대, 대한민국 제조업에 주어진 혁신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