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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톺아보기] 국립대·관공서 사칭해 "기계 먼저"… 진화하는 B2B 사기 주의보

"계약금 보낼게요, 일단 출하부터"… 산업계 울리는 신종 '먹튀'

점잖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K대학교 천안공과대학의 교수입니다.”

전화기 너머 그는 기계 사양을 조목조목 짚었고, 요청한 견적서에는 대학 로고와 주소, 연락처가 또렷이 박혀 있었다. 이후 이메일로 전달된 명함과 공문 양식의 서류, ‘예산 집행 일정으로 선출하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까지. 어느 하나 수상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트럭에 실린 기계가 공장을 떠나는 순간, 그 ‘교수’는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
남은 것은 기계 한 대의 손실과, 다시는 연결되지 않는 휴대전화 번호였다.

[산업톺아보기] 국립대·관공서 사칭해 "기계 먼저"… 진화하는 B2B 사기 주의보 - 산업종합저널 기계
개념 시각화 = 산업종합저널 (AI 활용)

‘거래형 노쇼’… B2B 시장의 새로운 사각지대
이 사건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다. 최근 산업기계 B2B 거래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유형의 사기, 이른바 ‘거래형 노쇼’다.
기존의 소비자 중심 노쇼가 개인 일상에 미치는 손해였다면, 거래형 노쇼는 수천만 원에서 억 단위까지 이르는 고가 자산의 일방적 탈취라는 점에서 피해 규모와 산업적 파급력이 전혀 다르다.

사기범들은 사립대뿐 아니라 국립대, 지방대 등 실존 대학의 교수 또는 시흥시청, 청송교도소 같은 공공기관 직원을 사칭해 접근했다.
견적서, 구매확약서, 고유번호증까지 준비된 이들은 판매업체에 수차례에 걸쳐 기계 사양을 문의하며 신뢰를 구축했고, 결제 지연을 이유로 ‘선출하’를 요청했다.

‘정식 계약 후 납품’이라는 원칙은 이들 앞에서 무력했다. 국립대 교수라는 지위, 서류의 정교함, 반복된 전화와 이메일은 일선 영업 담당자들의 의심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단순히 사기범의 정교한 연기력에 있지 않다.
그보다 산업기계 유통 시장이 오랫동안 ‘신뢰’에 기대어 운용돼온 구조적 특성이, 이번 범죄의 ‘기회’로 작용했다는 데 있다.

특히 중소업체의 경우, 국립대나 공공기관으로부터의 주문을 대형 거래처 확보 기회로 여겨 방어선을 낮추기 쉽다.
이들은 거래처가 요구하면 정식 계약 전이라도 견적서를 바탕으로 제품을 출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즉, 제품이 출고된 시점까지도 서면 계약 없이 신뢰만으로 움직이는 관행이, 사기범의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수사는 늦고, 피해는 회복되지 않는다
사기범이 위조된 명함과 견적서를 통해 고가의 산업재를 탈취하더라도, 법적으로 이를 사기로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계약 성립 여부, 선입금 유무, 대금 미납 시점 등 사안마다 법적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경찰 수사나 민사 대응으로 실질적 보상을 받기는 어렵다.

반면 사기범은 위조 문서와 일회성 휴대전화만으로 수천만 원 상당의 제품을 얻는다.
‘저위험 고수익’ 범죄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다아라의 대응… 플랫폼, 방파제가 되다
피해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플랫폼은 산업기계 전문 거래망 ‘다아라’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다아라는 플랫폼의 구조가 악용된 피해자에 가깝다.
회원사 간의 정보가 공개되는 구조 자체는 업계 관행에 부합하는 것이며, 이 구조를 이용해 범죄를 시도한 것은 사기범의 의도적 침투였다.

중요한 것은 다아라의 빠른 대응이었다.
피해 징후가 나타나자 즉각적으로 긴급 공지를 게시했고, 유사 전화번호, 명함, 문서 양식 등을 정리해 회원사들에 전파했다.
또한 유관기관에 직접 사실 확인을 요청하며 진위 여부를 명확히 가려냈고, 실시간 피해 사례 공유망을 통해 확산을 막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신속한 대응과 정보 확산 속도에서 플랫폼의 존재 이유는 더욱 뚜렷해졌다.
플랫폼은 단순한 거래 연결의 수단을 넘어, 산업 전반의 위험을 조기 인지하고 차단하는 방어선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신뢰는 자산이자 리스크… 관행을 넘는 시스템 필요
이번 사태는 단순한 경각심 수준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신뢰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산업일수록, 그 신뢰를 시스템적 검증 장치로 보완하지 않으면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거래 요청이 있을 경우 ▲대학·관공서 대표번호를 통한 직접 재직 확인 ▲견적서 발신 이메일 도메인 확인 ▲선입금 전 출하 금지 등의 최소한의 체크리스트가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또한 플랫폼 차원에서도 ▲회원사 상호 인증 프로세스 ▲의심 거래 경보 시스템 ▲사칭 정황에 대한 자동 알림 기능 등을 통해 보안 강화를 병행할 필요가 있다.
김보영 기자
cchby@industry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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