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기술탈취 신고가 한 달 만에 연간 수준을 넘어서면서, 그 배경과 정부의 대응 방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3월 말 출범시킨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신문고’에는 4월 말 기준 20건의 기술분쟁 신고가 접수됐다. 이는 2024년 20건, 2025년 16건에 그쳤던 연간 기술침해 행정조사 신고 건수와 맞먹는 수준이다. 중기부는 “신문고 출범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과거 연간 신고에 준하는 건수가 접수됐다”며 “그동안 숨겨져 있던 기술탈취 피해가 공식 창구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신문고에는 출범 이후 한 달여 동안 총 20건의 신고가 들어왔다. 이 가운데 8건은 지식재산 관련 조사기관, 경찰, 중기부 등에 이미 배부돼 조사·수사 단계에 들어갔고, 9건은 전문가 상담과 관계기관 협의를 진행 중이다. 나머지 3건은 기술탈취 해당성이 인정되기 어렵다고 판단돼 취하·반려 처리됐다.

기사 구성 및 AI 이미지 기획 = 산업종합저널
기존에는 중소기업이 기술탈취 피해를 호소하려면 중기부, 공정거래위원회, 특허청, 경찰 등 여러 기관을 각각 찾아다니며 문의해야 했다. 이번 신문고는 이 구조를 바꿔, 한 곳에 신고하면 법률 전문가 상담을 거쳐 분쟁 유형에 맞는 기관으로 연계하는 ‘원스톱 창구’로 설계됐다. 중기부는 중소기업들이 어디에 신고해야 할지 몰라 포기하던 구조를 바꾸기 위해 창구를 통합했다며 법률 상담과 기관 연계를 한 번에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기술탈취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공식 숫자와 현장 체감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지적이 꾸준하다.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3년 5월까지 하도급법·상생협력법 위반으로 적발된 기술자료 유용 사건은 126건이다. 이 가운데 20여 개 기업이 형사 고발됐고, 수십억 원 규모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그러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대기업·원청과 거래 과정에서 기술탈취 또는 유사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기업 비율이 공식 신고 건수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국회와 연구기관 보고서들은 “보복 우려, 거래 중단 가능성, 소송 비용 부담 때문에 상당수 피해 사례가 신고·소송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 중소기업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통계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전형적인 기술탈취 패턴’
법원 판결로까지 이어진 사건들을 보면, 기술탈취의 전형적인 패턴이 드러난다. 한 제조업체 사례에서, 대기업 D사는 협력업체에 특정 부품의 설계도와 제작 노하우를 “단가 협상과 품질 검토에 필요하다”며 요구했다. 협력업체는 이 요구를 수용해 상세 도면과 공정조건을 넘겼지만, 이후 D사는 단가를 이유로 거래를 끊고, 사실상 동일한 구조의 부품을 자체 생산해 납품했다.
법원은 이 사건에서 협력업체의 기술자료가 독자적으로 축적한 공정 노하우를 포함하고 있었고, D사가 거래 과정에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이를 취득한 뒤 유사 제품 생산에 활용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하도급 관련 법령상 기술자료 유용에 해당한다고 보고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또 다른 사건에서는 대기업이 수급업체로부터 받은 기술자료를 해외 제3의 협력업체에 제공해 생산에 사용한 사실이 드러나 제재를 받았다. 이 사건에서 법원과 감독기관은 “해당 자료가 수급업체가 직접 개발한 것이 아니더라도, 정당한 권원으로 보유하고 있고 그 제공이 거래상 불공정하게 강요됐다면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공동개발·시범사업(PoC) 과정에서의 갈등도 반복된다. 중소 IT기업이 대기업과 함께 시범사업을 진행하며 소스코드와 알고리즘 구조를 제공한 뒤, 본 계약 체결 없이 사업이 종료되고, 이후 대기업이 유사 기능을 가진 자체 솔루션을 출시한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제출된 코드와 출시된 제품의 구조적 유사성, 개발 기간 등을 종합해 중소기업의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하고 손해배상을 명령한 바 있다.
이들 판결은 공통적으로 ‘자료 요구 → 거래 지속 혹은 종료 → 유사 제품 등장’이라는 흐름 속에서, 자료의 구체성과 필요성, 유사 정도, 개발 가능성 등을 따져 기술탈취 여부를 가른다.
왜 지금 ‘신문고’인가…정부의 판단
정부가 뒤늦게나마 ‘범정부 신문고’를 꺼낸 것은, 기존 제도만으로는 기술탈취 문제를 제어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관계 부처는 2025년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방안’을 통해 기술탈취를 공정경제·산업 경쟁력 차원의 구조적 문제로 규정하고, 집중 감시체계 구축과 법 집행 강화, 피해기업 지원 확대, 추진체계 효율화를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이 방안에서 정부는 영세 중소기업이 기술탈취를 입증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 조사·소송 단계에서의 입증 지원과 손해배상 현실화를 주요 방향으로 잡았다. 징벌적 손해배상, 직권조사 확대, 기술자료 임치 제도 개선 등이 그 연장선에 있다. 중기부는 신문고를 통해 사건을 조기에 포착하고, 유형에 따라 중기부·공정위·특허청·경찰청 등으로 직접 연계함으로써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한성숙 중기부 장관은 신문고 출범 당시 기술탈취 피해를 입은 영세 중소기업이 손쉽게 신고하고 법률 전문가의 도움을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통합 창구를 마련했다며 범부처 대응단 및 관계부처와 협력을 강화하고 기술 보호를 위한 예산도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신문고 출범 한 달 만에 20건이 접수된 것은, 그동안 “말해도 소용없다”며 참아온 중소기업들이 적어도 신고는 해 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신호다. 그러나 진짜 승부는 그 다음 단계다.
기술탈취를 주장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여전히 △자료 전달 경위와 내용, △이후 출시된 제품의 유사성, △대체 개발 가능성 등을 입증해야 한다. 사건이 형사·민사 절차로 넘어가면, 수년간의 소송과 불확실한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 기업이 버틸 수 있도록 하는 법률·재정 지원, 현실적인 손해배상 수준, 재발 방지 효과를 담보할 수 있는 제재 강도 등이 관건으로 꼽힌다.
이번 신문고 출범과 초기 신고 증가가 보여주는 것은, “기술탈취를 당해도 숨고만 있던 시대에서, 최소한 공식 통로를 통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시대”로의 전환이다. 다시 말해, 신문고 가동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공식 통로는 열렸다. 관건은 자료 전달 경위, 출시 제품의 유사성, 대체 개발 가능성을 피해 기업이 직접 증명해야 하는 입증 책임의 무게를 덜어내는 데 있다. 신고 창구 통합을 넘어 소송 과정에서 피해 기업이 버틸 수 있는 재정 지원과 실효성 있는 손해배상 체계가 뒷받침되어야 실질적인 기술 보호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