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성장펀드가 전고체 배터리와 AI 반도체라는 두 축의 첨단 산업에 동시에 자금을 투입하기로 하면서 정부가 산업 정책의 방향을 다시 분명히 드러냈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기금운용심의회를 열어 울산 전고체 배터리 소재 공장 구축 사업과 삼성전자 평택 5라인 AI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프로젝트에 정책금융을 제공하기로 의결했다. 단순한 기업 지원을 넘어 첨단 제조업 경쟁력을 국가 전략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핵심은 차세대 배터리와 AI 반도체라는 두 기술을 동시에 키우겠다는 점이다. 울산 울주군 온산읍에 들어설 이수스페셜티케미컬의 황화리튬 생산 공장은 전고체 배터리의 핵심 소재 공급망을 국내에 구축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황화리튬은 고체 전해질에서 리튬 이온 전달 속도를 높이는 소재로 전고체 배터리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원료로 평가된다. 정부는 첨단전략산업기금을 통해 약 1천억 원을 3%대 초반 금리로 장기 대출한다. 기업의 대규모 설비 투자 부담을 낮추고 생산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전고체 배터리는 에너지 밀도가 높고 충전 속도가 빠르며 열 발생이 적어 안정성이 높은 차세대 이차전지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 넘어 전기차, 드론, 휴머노이드 로봇, 에너지저장장치 등 미래 산업의 핵심 동력원으로 꼽힌다. 글로벌 배터리 기업들이 2027년 전후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소재 공급망을 먼저 확보하는 것은 산업 주도권을 좌우할 변수다. 중국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을 확대하는 가운데 한국은 기술 격차로 프리미엄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을 택했다. 이번 공장은 그 전략의 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규모가 훨씬 크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 건설되는 다섯 번째 반도체 공장인 P5 프로젝트는 총 사업비가 60조원 이상으로 추산되는 초대형 투자다. 이번 1단계 설비투자에는 약 8조8천억 원이 투입되며 이 가운데 2조5천억 원을 정책금융과 시중은행이 저리로 지원한다. 첨단전략산업기금이 약 2조원을 국고채 수준 금리로 공급하고, 5대 은행이 각각 1천억 원씩 참여하는 방식이다. 반도체 산업이 국가 간 경쟁이 된 상황에서 정책 금융을 통해 민간 투자를 끌어내겠다는 구조다.
AI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반도체 시장의 중심도 바뀌고 있다. 연산 성능을 좌우하는 HBM 같은 고대역폭 메모리와 이를 생산하는 첨단 파운드리가 핵심 경쟁 영역으로 떠올랐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분야에서는 여전히 강점을 유지하고 있지만 파운드리에서는 대만 TSMC를 추격하는 위치다. 평택 P5 공장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공정을 동시에 운영하는 생산 기지로 설계된다. 차세대 HBM 제품을 유기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구조다. 정부의 금융 지원으로 당초 2030년 전후로 예상되던 가동 시점도 2028년으로 앞당길 계획이다.
지원이 단순히 대기업 투자에 머무르지 않도록 상생 모델도 포함됐다. 삼성전자는 평택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협력사를 위해 2000억 원 규모 특례보증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기존 상생펀드와 ESG 펀드 지원 범위도 2차 협력사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일부 공정에서는 국내 장비 업체 제품을 시험 도입해 기술 이력을 쌓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반도체 산업이 장비와 소재 부품 기업까지 연결된 생태계 산업이라는 점을 고려한 조치다.
정부가 두 사업을 동시에 승인한 배경에는 산업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는 단순한 제조 산업을 넘어 경제 안보와 직결된 전략 산업이 됐다. 미국과 유럽은 자국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다. 중국 역시 대규모 국가 자금을 통해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이 기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민간 투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평택 5라인 AI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프로젝트
이번 프로젝트는 국민성장펀드의 첫 메가 프로젝트 가운데 일부다. 정부는 AI 컴퓨팅 센터, 재생에너지 사업, 전력 반도체 생산 공장 등 총 7개 사업을 순차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사업 진행 상황과 자금 수요에 맞춰 추가 승인도 이어질 전망이다. 정책 금융이 첨단 산업 투자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다만 정책금융 중심의 산업 지원이 지속 가능한 성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반도체와 배터리는 기술 경쟁 속도가 빠르고 투자 규모도 계속 커지고 있다. 공급망 재편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기술 개발 속도와 글로벌 협력 구조가 동시에 요구된다. 정부의 자금 지원이 산업 생태계 전반의 기술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관건이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는 더 이상 개별 기업의 사업 영역이 아니다. 국가 산업 전략의 중심이다. 이번 금융 지원은 정부가 그 전선을 어디에 그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앞으로 몇 년 동안 한국 제조업의 미래는 이 두 산업에서 판가름 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