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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톺아보기] 기름 냄새에 스며든 불안, 숫자는 말하지 않는 것들

거시경제의 활자 뒤에 숨은 미시적 삶의 고단한 기록

[산업톺아보기] 기름 냄새에 스며든 불안, 숫자는 말하지 않는 것들 - 산업종합저널 에너지
개념 시각화 = 산업종합저널 (AI 활용)

퇴근길 버스를 탔다. 버스 문이 닫히는 순간, 기름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코끝을 찌르는 그 냄새가 낯설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오래 머물렀다. 기사 라디오는 평소보다 컸고, 뉴스 앵커의 목소리는 숫자를 또박또박 읽어냈다. 배럴당 118달러. 누군가 짧게 혀를 찼다. 아무도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숫자는 충분히 설명이 된다는 듯, 버스 안 공기를 눌렀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주유소 가격표를 보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제보다 몇십 원 오른 숫자였다. 큰 차이가 아닌데도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당장 무언가가 무너진 것도 아닌데, 하루의 일부가 조용히 깎여나간 기분이었다. 전쟁은 뉴스 속 그래프에서 움직이는데, 내 하루는 주유소 앞에서 멈춰 섰다.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그때도 사람들은 전쟁보다 기름값을 먼저 이야기했다. 택시 요금이 오르고, 배달비가 오르고, 결국 밥값이 올랐다. 그 과정을 여러 번 겪으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순서를 익혔다. 전쟁은 멀고, 가격은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설명할 때 더 이상 사람을 떠올리지 않는다. 숫자를 먼저 떠올린다.

저녁에 만난 친구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엔 얼마나 더 오를까”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정부 이야기가 잠깐 오갔고, 곧 체념으로 흘렀다. 신기하게도 전쟁 이야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누가 싸우고 있는지, 누가 죽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는 듯, 아니 굳이 알 필요 없다는 듯 넘어갔다. 전쟁은 이미 ‘공급 차질’이라는 말로 번역돼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창문에 비친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를 보낸 사람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가까웠다. 이미 영향을 받고 있었고, 이미 선택을 바꾸고 있었고, 이미 삶의 속도를 조금씩 늦추고 있었다. 다만 그 변화를 전쟁이 아니라 숫자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름 냄새는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 냄새는 단순한 연료의 냄새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삶이 타들어가는 과정이 정제된 뒤 남은 냄새였다. 우리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숫자로 환산된 순간, 고통은 설명 가능한 것이 되고, 설명 가능한 것은 견딜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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