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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톺아보기] 멈춰 선 호르무즈, 물류 패러다임이 바뀐다…한국 산업의 생명줄 ‘IMEC’

산업연구원, 해상 초크포인트 위기 상시화 진단…“15년 골든타임, 레거시 산업 우회로 확보해야”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자 거대한 유조선이 엔진을 껐다. 홍해에서 무장세력의 공격이 이어지자 아시아를 출발한 컨테이너선은 수에즈 운하를 포기하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세계 무역의 숨통이 불과 몇 개의 좁은 바닷길에 과도하게 묶여 있다는 치명적인 취약성이 수면 위로 드러난 장면이다.

산업연구원(KIET)이 최근 발간한 ‘미국-이란 분쟁과 글로벌 물류경로 재편 가능성’ 보고서는 반복되는 해상 병목 현상을 단기적 사건이 아닌 구조 변화의 전조로 진단한다. 단기적인 유가 변동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향후 10~15년간 이어질 산업과 인구 구조 전환기를 버텨낼 ‘대체 경로’를 지금 당장 설계해야 한다는 경고다.

좁은 바닷길에 갇힌 한국 산업의 아킬레스건
한국 경제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해상 요충지는 호르무즈 해협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5년 기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석유는 하루 평균 2,000만 배럴에 달한다. 세계 해상 석유 거래량의 25%를 차지하는 규모다. 연간 액화천연가스(LNG) 통과 물량 역시 1,120억 ㎥로 세계 거래량의 20% 수준이다.

[산업톺아보기] 멈춰 선 호르무즈, 물류 패러다임이 바뀐다…한국 산업의 생명줄 ‘IMEC’ - 산업종합저널 에너지
개념 시각화 = 산업종합저널 (AI 활용)

한국의 중동 의존도는 세계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다. 수입 원유의 70%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들어온다.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 수입 물량의 60%도 중동에 기대고 있다. LNG 수급에서도 중동 비중은 15~20%를 차지한다.

최근 미국과 이란의 충돌 직후 집계된 수치는 물류망의 붕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선박은 2월 하루 평균 135척에서 3월 24일 기준 4척으로 급감했다. 중동과 아시아를 잇는 초대형유조선(VLCC) 운임지수는 미군 공습 직전 225에서 불과 나흘 만에 465.5로 치솟았다. 우회 항로를 선택한 선박들은 운항 기간 연장과 함께 보험료, 연료비, 운임 폭등이라는 삼중고를 겪었다.

홍해와 수에즈 운하 역시 안전판 역할을 상실했다. 예멘 후티 무장세력의 공격 이후 아덴만을 지나는 물동량은 전년 대비 76% 줄었다. 수에즈 운하 통과 물량은 70% 감소한 반면, 희망봉을 도는 우회 항로 이용률은 89% 급증했다.

값싼 공격과 비싼 방어, 상시화된 물류 위협
길은선·조은교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련의 사태를 예외적인 돌발 변수로 치부하지 않는다. 해상 초크포인트 위기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환경이 이미 굳어졌다고 분석한다.

가장 큰 변화는 무기 체계의 비대칭성이다. 자폭 드론과 저가 순항미사일은 수십만 달러면 확보할 수 있다. 반면 이를 막아내는 요격 체계는 한 발당 수백만 달러를 소모한다. 값싼 공격과 비싼 방어의 조합은 전면전 없이도 특정 해협을 마비시킬 수 있는 구조를 낳았다.

물류 구조 자체의 모순도 위험을 키운다. 효율성만 추구하며 설계된 글로벌 운송망은 소수의 초크포인트에 집중돼 있다. 중동 지역에는 호르무즈, 바브엘만데브, 수에즈 세 지점이 밀집해 있어 한 곳에서 분쟁이 터지면 나머지 두 곳의 연쇄 마비가 불가피하다. 미국의 에너지 자급력 상승으로 동맹국 해상수송로 보호 의지가 약화된 점도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일대일로와 다른 IMEC, 반도체·부품의 새 우회로
산업연구원이 대안으로 주목하는 카드는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이다. 인도에서 생산된 화물을 홍해로 보내지 않고, 아랍에미리트(UAE)와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거쳐 유럽으로 운송하는 육·해상 복합 회랑이다.

인도 항만에서 출발한 컨테이너를 두바이 항만에서 하역한 뒤 육상 철도로 사우디아라비아를 횡단하고, 이스라엘 하이파 항만에서 다시 지중해 해상 운송으로 유럽에 진입하는 구조다. 단순한 화물 운송을 넘어 전력망, 디지털 케이블, 청정수소 파이프라인 구축 계획까지 포함한다.

IMEC 구상은 2023년 주요 20개국(G20) 뉴델리 정상회의에서 미국,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유럽연합(EU) 주요국이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공식화됐다. 중동 해역의 불안이 고조되면서 홍해를 우회하는 전략적 가치는 더욱 커졌다.

물론 한계는 명확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의 철도 라인을 합쳐도 수송 능력은 하루 470만 배럴 수준이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 물동량 2,090만 배럴을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반도체, 전자, 자동차 부품처럼 운송 시간이 곧 경쟁력인 고부가가치 품목에게는 시장 판도를 바꿀 핵심 우회로가 될 수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와 비교하면 IMEC의 가치는 더욱 뚜렷해진다. 일대일로는 중국이 금융과 시공을 독점하는 구조라 제3국 기업의 참여 비중이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반면 IMEC는 다국적 이해관계자가 얽힌 다자 협력형 모델이다. 국제 입찰을 통해 한국 건설사, 플랜트 기업, 항만 설비 제조사가 진입할 틈새가 열려 있다.

15년의 골든타임, 레거시 산업의 생명 연장
보고서는 향후 10~15년을 한국 산업의 운명을 가를 중대 분수령으로 지목한다. 2차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 시점과 2000년대생의 노동 시장 진입이 맞물리는 시기다.

길은선 연구위원은 향후 15년을 전통 산업과 미래 산업이 교차하는 완충 기간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기존 인력이 10년 이상 노동 공급을 유지하는 동안, IMEC 프로젝트 참여를 통해 건설, 기계, 전력 분야 등 레거시 산업의 외부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논리다.

물류망의 기준이 ‘비용 절감을 위한 최단 거리’에서 ‘생존을 위한 위험 분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IMEC가 당장 확정된 수익 모델은 아니지만,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신호가 켜졌을 때 즉각 올라탈 수 있는 거점 설계가 시급하다. 바다는 결코 예전의 평화로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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