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원짜리 스마트 안전장비가 공장 한편, 먼지 쌓인 선반 위에 서 있다. 위험 공정을 개선하겠다며 정부 지원금을 받아 새 설비를 들인 사업장은 기존 노후 장비를 폐기하지 않고 다른 공장에 되팔았다. 최근 3년간 약 800억 원이 투입된 스마트 안전장비와 연 1조 원대 규모 산재 예방 재원이 향한 목적지는 ‘위험요인 제거’였지만, 점검 결과 드러난 것은 예산 집행 실적과 재해 예방 효과 사이의 깊은 간극이었다.
![[산업 톺아보기] 산재 예방기금 1조 원의 역설… - 산업종합저널 FA](http://pimg3.daara.co.kr/kidd/photo/2026/04/30/thumbs/thumb_520390_1777500251_45.png)
국무조정실 정부합동 부패예방추진단 단장을 맡고 있는 김영수 국무1차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예산은 집행됐는데, 현장은 변하지 않았다
국무조정실 정부합동 부패예방추진단과 고용노동부가 2021~2024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재해예방사업을 들여다본 결과, 지원금이 투입된 장비와 설비가 실제 작업 현장에서 얼마나 ‘켜져 있는지’를 묻는 질문 앞에서 사업의 취약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스마트 안전장비 지원 내역 345건을 표본 점검한 결과 60%가량이 전원이 꺼져 있거나 고장·방치 상태였다. 차량 충돌예방장치는 10대 중 8대, 근력보조슈트는 4대 중 3대가 제대로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후 설비 교체를 지원하는 ‘안전동행’ 사업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2024년 교체 지원을 받은 4,111개 사업장 가운데 기존 장비를 실제로 폐기한 곳은 22.7%에 그쳤고, 나머지 77.3%는 낡은 설비를 그대로 돌리거나 다른 사업장으로 반출·매각했다. 신규 설비 지원이 위험 설비 제거가 아니라 설비 보유 총량을 늘리는 수단으로 활용된 셈이다. 민간 전문기관을 통해 위험요인을 진단·개선하는 기술지도 역시 사망사고가 잦은 지붕 공사·제조 현장보다는 도심 인테리어 등 발굴이 쉬운 저위험 현장에 쏠렸다. 지적된 위험 요인을 개선하지 않은 제조 사업장 중 추가 점검을 받은 비율은 5% 수준에 그쳤다.
요약하면, 지원의 기준은 ‘위험의 크기’가 아니라 ‘사업 발굴의 용이성’과 ‘장비 보급 실적’에 더 가까웠다. 예산은 현장에 들어갔지만, 위험은 자리를 지킨 채였다.
눈먼 돈이 된 보조금, 시스템을 비켜간 검증
점검에서 드러난 보조금 부정수급 구조는 낯설지 않다. 로봇청소기 등 안전장비 가격을 세금계산서로 부풀려 지원금을 받은 뒤, 사업주의 자부담금을 판매업체가 현금으로 되돌려주는 ‘페이백’ 방식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이와 같은 부정수급 81건을 적발해 약 94억 원을 환수하기로 했다. 해당 업체들이 납품한 사례 191건 전체는 별도의 수사 대상으로 넘어갔다.
건설 현장 안전시설 설치비 지원 사업에서도 허점은 반복됐다. 50억 원 미만 소규모 현장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공사금액과 현장 수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하나의 현장을 여러 건으로 쪼개거나 공사비를 축소신고해 과다 지원을 받은 사례만 571건이 적발됐다. 다른 공공기관의 설비 지원과 겹치는 중복 체계도 관리되지 않았다. 2024년 한 해만 놓고 봐도 동일 설비에 두 기관이 나란히 자금을 투입한 건수가 29건, 이 중 14건은 실제 설비 투자비를 초과하는 수준까지 돈이 들어갔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이 장비가 실제로 위험을 줄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뒤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세금계산서와 지원 신청서가 기준이었고, 장비 사용 실적과 재해 발생률 변화는 부차적인 항목에 머물렀다.
사후관리는 늦었고, 책임의 화살은 흐릿했다
지원 이후 관리 단계에서도 구조적 빈틈이 확인됐다. 장비가 제대로 사용되는지 확인하는 사후 기술지도에서 허위·부실 보고 191건이 적발됐다. 사용하지 않는 장비를 정상 사용으로 기재하거나, 현장 확인 없이 서류만으로 점검을 마무리한 사례들이다. 지원 시점 이후 사업장이 폐업했는데도 보조금 환수나 지원 취소 조치가 적시에 이뤄지지 않은 건 145건에 달했다. 폐업 확인에 평균 60일 이상 걸리면서 환수 시점을 놓친 사례도 잇따랐다.
국무조정실과 고용노동부는 부정수급·과다 지원·사후관리 부적정 등 위법·부적정 세부 사례가 총 2047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김영수 국무1차장은 “현장 활용도가 높은 장비 위주로 지원 절차를 개편하고, 노후 위험 설비 폐기를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집행 기준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위은환 국책사업과장은 “공단 내에 부정수급 전담 조직을 신설해 감시망을 촘촘히 구축하고, 자진신고를 유도하는 제도도 마련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관건은 대책의 방향이 ‘정책 문서’에서 ‘현장 풍경’으로 얼마나 옮겨갈 수 있느냐다. 지금까지 구조는 지원·집행·점검이 각각의 절차로 나뉘어 움직였고, 그 사이에서 위험은 다시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산재 예방, “돈을 썼다”에서 “위험이 줄었다”로
이번 점검은 산재 예방정책의 기준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지금까지의 기준이 “얼마나 지원했는가”와 “얼마나 많은 장비를 공급했는가”였다면, 앞으로의 기준은 “위험이 얼마나 줄었는가”, “위험 요인이 제거될 때까지 장비·설비가 실제로 작동했는가”가 되어야 한다.
산재 예방기금 1조 원 규모의 투입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돈이 안전을 얼마나 바꾸고 있는지에 대한 데이터와 검증이 뒷전으로 밀려 있다는 점이다. 장비 목록과 사진, 지원 실적이 아니라 사용 시간, 위험 노출 시간 감소, 사고 건수 변화 같은 지표가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정책 언어는 이미 ‘현장 중심’, ‘재해 예방 효과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언어가 예산 편성·장비 선정·사후 점검의 기준으로 실제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산재 예방기금 1조 원은 앞으로도 ‘얼마나 썼는가’만 남기고 ‘무엇이 달라졌는가’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한 채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