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배너
윙배너

[이슈] 수십 년째 묻는 성장과정, 기업은 무엇을 보고 있나

직무 중심 채용 구호와 낡은 자기소개서 문항 사이의 간극

취업준비생은 또다시 빈칸 앞에 앉는다. 성장과정, 성격의 장단점, 지원동기, 입사 후 포부. 익숙한 문항들이 화면에 뜬다. 너무 오래 본 질문이라 오히려 더 막막하다. 무엇을 쓰라는 것인지 알 것 같지만, 정작 무엇을 평가하겠다는 것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기업은 직무 역량을 보겠다고 말하지만, 지원자에게 건네는 질문은 여전히 한 사람의 생애를 대강 훑어보겠다는 식에 가깝다. 이 오래된 어긋남이 채용 시장의 피로를 키우고 있다.
[이슈] 수십 년째 묻는 성장과정, 기업은 무엇을 보고 있나 - 산업종합저널 FA
일러스트=AI 생성 이미지

재단법인 교육의봄은 2025년 하반기 신입 채용 자기소개서 130건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은 2025년 6월부터 10월까지 채용플랫폼 잡코리아에 공고를 올린 122개 기업이다. 매출액 1,000대 기업이 중심이었다. 분석 결과 130건 가운데 33.1%인 43건은 지원자가 어떤 방향으로 답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질문을 담고 있었다. 직무와 직접 연결되는 질문이 하나도 없는 사례도 13.1%인 17건으로 집계됐다. 자기소개서가 일의 적합성을 가려내기 위한 서류라면 꽤 불편한 숫자다.

문제는 질문의 오래됨 자체가 아니다. 성장과정이나 지원동기라는 항목도 설계하기에 따라 의미 있는 평가 도구가 될 수 있다. 특정 직무를 선택하게 된 계기, 그 선택을 뒷받침한 경험, 앞으로 맡을 업무와의 연결성을 묻는 방식이라면 지원자의 생각과 준비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단어만 던져놓고 지원자가 알아서 해석하라는 식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업은 역량을 보겠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떤 경험을 어떤 기준으로 써야 하는지 안내하지 않는다. 결국 지원자는 직무보다 인생사를 늘어놓고, 평가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성된 답변을 놓고 비교해야 한다. 양쪽 모두에게 비효율이다.

가장 낡은 방식은 명사형 항목을 그대로 나열하는 구성이다. 일부 기업은 성장 배경, 학교생활, 생활신조, 장래계획처럼 오래된 자기소개서의 틀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글자 수 제한은 있지만 평가 의도는 잘 보이지 않는다. 지원자는 성실함을 보여줘야 하는지, 직무 경험을 써야 하는지, 조직 적응력을 강조해야 하는지 스스로 추측해야 한다. 채용은 예측 게임이 되고, 자기소개서는 역량의 증거가 아니라 문항 해석 능력의 시험지가 된다.

질문을 문장으로 바꿨다고 해서 곧바로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해당 직무에 지원한 이유를 쓰라”, “입사 뒤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적으라”는 식의 문항은 겉으로는 친절해 보인다. 그러나 해당 업무에서 필요한 능력, 실제 수행할 일, 평가자가 확인하려는 경험의 범위가 빠져 있으면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름표만 바꾼 낡은 질문이다. 기업이 알고 싶은 것이 문제 해결 경험인지, 고객 대응력인지, 데이터 활용 능력인지 드러나지 않으면 지원자는 또다시 안전한 문장으로 도망간다. “열정”, “소통”, “도전” 같은 말이 반복되는 이유는 지원자의 게으름만이 아니다. 질문이 흐리면 답변도 흐려진다.

더 큰 문제는 업무와 맞닿은 질문이 아예 없는 경우다. 교육의봄 분석에서 17건은 자기소개서 전체를 통틀어 지원 직무와 직접 연결되는 문항을 담지 않았다. 특히 이 사례들이 모두 여러 직무를 한꺼번에 모집한 공고였다는 점은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해외영업, 연구개발, 공정 소재 개발, 법무, 사무, 디자인은 서로 다른 능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같은 양식으로 모두를 평가한다면 직무 중심 채용이라는 말은 힘을 잃는다. 여러 일을 뽑을수록 질문은 더 정교해야 하는데, 현실은 오히려 표준 양식 뒤로 숨어버린 셈이다.

기업의 사정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신입 채용에서 직무별 문항을 세밀하게 설계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든다. 현업 부서와 인사팀이 함께 업무 내용을 정리해야 하고, 평가 기준도 맞춰야 한다. 대규모 공채를 운영하는 기업일수록 하나의 양식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편의는 언제나 비용을 남긴다. 기업이 질문을 정교하게 만들지 않으면 지원자는 스펙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학점, 어학점수, 자격증, 대외활동 횟수가 다시 전면에 등장한다. 역량을 보겠다는 채용이 스펙 경쟁을 밀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소개서의 실패는 한 장의 서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채용공고에서 실제 업무 정보를 충분히 주지 않고, 이력서에서는 많은 스펙을 요구하며, 자기소개서에서는 모호한 질문을 던지는 구조가 이어지면 구직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결국 가장 눈에 잘 보이는 것을 쌓는다. 기업은 스펙보다 역량을 보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역량을 설명할 무대는 충분히 마련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지원자들의 답변이 다 비슷하다”고 말한다면 책임의 절반은 질문을 던진 쪽에도 있다.

교육의봄은 대안으로 ‘온스펙 역량지원서’를 개발해 보급하겠다고 밝혔다. 핵심은 직무요건을 바탕으로 지원자가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서류 양식을 다시 짜자는 것이다. 채용공고에는 실제 업무와 팀 환경, 필요한 능력을 더 분명히 적고, 입사지원서에는 그 요건과 연결되는 경험을 묻는 방식이다. 그래야 기업은 지원자를 비교할 기준을 얻고, 지원자는 불필요한 추측 대신 자신의 경험을 정리할 기회를 갖는다.

다만 대안이 선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직무 중심 채용은 좋은 문항 몇 개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업 내부에서 실제로 어떤 능력을 필요로 하는지 합의해야 하고, 평가자가 그 기준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서류 문항은 바뀌었는데 면접에서 다시 인상과 학벌, 말솜씨로 돌아간다면 변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온스펙이라는 이름이 또 다른 양식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채용 전 과정의 기준을 함께 바꿔야 한다.

수십 년째 반복되는 자기소개서 문항은 한국 채용문화의 관성에 가깝다. 기업은 익숙해서 쓰고, 지원자는 불안해서 맞춘다. 그 사이에서 직무 역량이라는 말은 자주 호출되지만 제대로 검증되지는 않는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좋은 인재를 찾고 싶다면 먼저 좋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성장과정을 묻기 전에 그 성장이 어떤 업무와 연결되는지 물어야 한다. 포부를 요구하기 전에 입사 뒤 맡게 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줘야 한다. 채용의 공정성은 평가 결과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지원자에게 무엇을 묻는가에서 이미 시작된다.


0 / 1000


많이 본 뉴스

[기획] ‘신중 속 선택적 확장’…2026년 기업 투자·경영 전략의 두 얼굴

2026년을 맞이한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고환율, 고금리, 글로벌 통상 리스크 등 대외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기업들은 ‘확장’보다는 ‘유지’, ‘보수’보다는 ‘선택적 전진’을 택했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움츠러든 것은 아니다. 산업별·기업규모별로 온도차가

[피지컬 AI, 한국 제조의 다음 10년] 4부_“사라지는 명장 손맛, AI로 살린다”

경기도 시흥 정왕동에 들어서는 ‘피지컬 AI 확산센터’는 838㎡ 규모의 로봇·AI 실증 거점이다. 정왕어울림센터 5층 경기시흥 AI 혁신센터 내에 조성되며, 반월·시화 국가산단과 시흥스마트허브를 배후로 제조·물류 기업의 공정 데이터를 수집하고 로봇·AI를 실제 산업 현장과 유사한 조건에서 시험

[이슈 기획] AI가 흔드는 반도체 제조, 누가 살아남을까

AI 시대, 미세공정만으론 버티기 어려운 구도 AI 수요 확대는 반도체 제조의 설계와 생산 방식을 동시에 바꾸고 있다. 201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전공정과 후공정이 비교적 분리된 분업 구조를 유지했지만, 이제는 칩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공정 전 단계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데이터는 연료인가, 도둑질인가"… AI 저작권, '공정 이용'의 딜레마

AI 학습에 사용되는 데이터의 저작권 문제가 산업 전반의 중대한 화두로 떠올랐다. 그동안 ‘공정 이용’이라는 이름 아래 포장되어온 관행이 기술의 확산 속에서 더 이상 용인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AI 기업들과 콘텐츠 제작자 양측 모두에게 시급한 판단을 요구한다. 특히 한국은 주요국과 달

[피지컬 AI, 한국 제조의 다음 10년] 3부_시흥 ‘확산센터’ 설계도

경기도 시흥 정왕동에 들어서는 ‘피지컬 AI 확산센터’는 규모와 입지부터 철저히 현장을 겨냥한다. 센터는 정왕어울림센터 5층 경기시흥 AI 혁신센터 내 전용면적 838㎡ 규모로 조성되며 로봇과 AI를 실제 공정과 유사한 조건서 시험하는 실증 공간으로 운영된다. 1월 말부터 한 달간 진행된 입




산업전시회 일정


미리가보는 전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