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가 이달 1일부터 새로운 철강 수입관리 제도인 관세할당제도(TRQ)를 시행하면서 전체 무관세 수입 물량을 약 46% 줄였다. 다만 한국산 철강에 배정된 무관세 쿼터 감소폭은 19.7% 수준에 그친 것으로 정리됐다. EU 철강시장 접근 여건 자체는 나빠졌지만 한국 철강업계는 주요 경쟁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조건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EU는 2018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근거한 철강 글로벌 세이프가드 조치를 운영해 왔다. 해당 조치가 올해 6월 30일 종료되면서 EU는 이를 대체할 새로운 수입관리 제도를 도입했다. EU는 '철강 공급과잉 대응법'을 제정하고 지난 1일부터 철강 30개 품목을 대상으로 일정 물량까지는 무관세를 허용하되 이를 초과하는 수입 물량에는 50% 관세를 부과하는 TRQ를 시행했다.
EU가 허용하는 전체 무관세 수입 물량은 기존 세이프가드 체제상 총 수입쿼터 3,382만 톤에서 1,835만 톤으로 줄었다. 절반 가까운 물량이 사라진 셈이다. EU 시장을 두고 경쟁해 온 주요 철강 수출국들에는 시장 접근 문턱이 높아진 결과다.
산업계의 안도감은 숫자에서 비롯된다. 전체 무관세 물량이 약 46% 줄어든 반면 한국산 철강 쿼터 감소폭은 19.7%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논평을 통해 “한국산 철강 쿼터는 19.7% 감소에 그쳐 주요 경쟁국과 비교해 우호적인 수준으로 조정된 점을 환영한다”며 “당초 큰 폭의 감축을 우려했던 우리 업계의 부담을 완화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국철강협회도 비슷한 평가를 내놨다. 협회는 EU 전체 무관세 수입쿼터가 절반 가까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한국산 철강의 EU 수출 기반을 최대한 방어한 정부 당국의 노력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특히 우리나라의 쿼터 감소폭을 최소화하고 주요 경쟁국 대비 양호한 수준의 무관세 물량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했다.
협상 결과는 한국산 철강이 유럽 산업 공급망에서 맡아 온 역할이 반영됐다는 게 산업계의 판단이다. 한국 철강은 자동차·기계·가전·에너지 등 유럽 주요 산업에 고품질 철강재를 공급해 왔다. 대한상의는 “유럽 주요 산업 공급망에 기여해 온 한국 철강의 중요성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대EU 수출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우리 산업계도 보다 안정적인 수출 여건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현 사안을 최우선 통상현안 중 하나로 관리해 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4월부터 한-EU 철강 쿼터 협상을 진행하며 한국산 철강이 EU 산업 경쟁력과 공급망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해 왔다. 한국이 글로벌 철강 공급과잉 해소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해 왔다는 점도 협상 과정에서 강조했다.
산업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달 16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한국철강협회 및 주요 철강기업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협상 상황과 업계 영향을 점검했다. 당시 여 본부장은 EU의 신철강 조치가 “우리 철강업계의 수출과 투자, 고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며 정부가 정상외교, 고위급 협의, 실무 협상 등 가능한 채널을 동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철강협회는 특히 정상외교가 협상의 결정적 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협회는 대통령이 한-EU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FTA 체결국이자 전략적 파트너임을 강조하고 EU의 TRQ 조치가 양측 산업 협력과 공급망 안정, 투자 및 고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고 밝혔다. 한국산 철강에 대한 우호적 고려를 요청한 최고위급 협의가 협상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취지다.
다만 결과를 낙관적으로만 보기는 어이번 렵다. 한국의 감소폭이 상대적으로 작았을 뿐 EU의 전체 무관세 물량은 이미 크게 줄었다. 쿼터를 넘는 순간 50% 관세가 붙는 구조에서는 수출 물량 관리와 품목별 전략이 이전보다 중요해진다. 무관세 범위 안에서는 기존 거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쿼터 소진 이후에는 가격 경쟁력과 납기 계획에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철강협회는 확보한 EU 시장 접근 기회가 실제 수출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품목별 수출 전략을 점검하고 쿼터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공정한 수출 관행과 거래 투명성을 강화해 안정적인 수출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도 내놨다.
대한상의도 후속 협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한상의는 “무관세 쿼터를 초과하는 물량에는 고율 관세가 적용되는 등 EU 수출 부담이 커진 만큼 한-EU 양측의 지속적인 협의와 정부 지원을 통해 우리 기업의 시장 접근 여건이 한층 개선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철강산업을 둘러싼 통상 환경은 더 거칠어지고 있다. 주요국들은 글로벌 공급과잉에 대응해 관세 인상, 세이프가드, 반덤핑·상계관세 등 수입규제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EU도 이런 흐름 속에 놓여 있다. 한국 철강업계가 이번 협상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을 확보했더라도 보호무역주의 확산이라는 큰 흐름 자체가 꺾인 것은 아니다.
현재 협상은 한국산 철강이 E급망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방어에 성공했다는 말만으로 끝낼 수는 없다. 업계의 과제는 줄어든 쿼터 안에서 품목별 수출 전략을 다시 짜고 확보한 물량을 실제 성과로 연결하는 일이다. 정부 역시 한-EU 후속 협의를 통해 시장 접근 여건을 추가로 넓혀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