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 산업의 엔진이 식고 있다. 설비는 놀고, 재고는 쌓이고, 주문은 줄고 있다. 이런 흐름은 경기순환의 일시적 둔화가 아니라 ‘구조적 붕괴’라는 경고가 현장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에 정부와 국회는 산업 자체의 체질 개선을 위해 ‘석유화학산업 특별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법 하나가 아니라 방향이다.
지난 1일, 국회입법조사처 주최로 열린 전문가 간담회에서는 석유화학산업의 위기를 둘러싼 다층적인 분석이 제기됐다. 발제를 맡은 산업연구원의 조용원 연구위원은 이번 위기가 단순한 과잉 공급 때문이 아니라, 중국의 공격적인 생산시설 확장과 공급망 내재화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은 이미 다운스트림 제품부터 시작해 업스트림 핵심 공정까지 생산 기반을 넓혀가고 있으며, 한국의 경쟁력은 그에 비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조정이 절실하다는 데에는 현장도 정부도 뜻을 같이한다. 그러나 그 구조조정이 가능하냐는 또 다른 질문이다. 기업 간 설비 감축 협의조차 담합으로 간주될 수 있는 국내 공정거래 규제 환경에선, ‘자발적 감축’이라는 말 자체가 허상에 가깝다는 회의가 나온다.
실제로 LG화학의 정종은 상무는 “기업들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보 공유나 사업 재편 논의가 법적 제약에 막혀 있다”고 말했다. SK지오센트릭 김용수 실장도 “이 상태로 구조조정을 하면 오히려 경쟁국에 기회를 주는 셈”이라며, 정책적 전환 없이 생산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국내 산업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8월 ‘석유화학 구조 개편 로드맵’을 내놓았고, 국회는 업계의 요청을 반영해 ‘특별법’ 논의에 착수한 상태다. 현재 정부는 연말까지 각 기업의 재편 계획을 취합해 승인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특별법’이 위기를 구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한국화학산업협회의 최홍준 본부장은 중동의 저가 원료, 미국의 셰일 기반 원가 경쟁력, 그리고 중국의 거대한 생산능력을 언급하며 “지금 문제는 단순한 생산과잉이 아니라 구조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특별법의 방향이 논란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업계는 세제 감면, 전기요금 인하, 기술 전환 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시민사회 일각에선 “이런 법이 사실상 ‘산업 특혜법’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탄소중립’이라는 국가 목표와 ‘다배출 산업 유지’라는 지원 논리가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발제를 맡은 조용원 위원은 이 간극을 좁힐 하나의 실마리로 해외 사례를 언급했다. 일본의 경우, 특정 지역에서 석유화학 생산을 줄이는 대신 ICT나 헬스케어 같은 신산업을 유치하며 전환에 성공한 바 있다. 유럽연합은 탄소 감축 노력을 가격에 반영하는 정책을 설계하고 있으며, 녹색채권 발행을 통해 산업 전환의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이 참고할 만한 정책 방향이다.
정부도 특별법 필요성에는 공감한다고 밝히고 있다. 산업통상부 화학산업팀의 김건혁 팀장은 “산업 특성상 일반적인 기업활력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법안의 구체적 내용이나 제정 시기, 책임 분담 방식은 정해지지 않았다.
문제는 시간이다. 석유화학 설비 하나를 줄이는 데에도 수개월이 걸리고, 관련 지역의 고용과 상권이 붕괴되면 복구는 수년 이상 걸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줄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줄이고, 무엇을 새로 만들 것인가’라는 전략적 판단이다.
‘석유화학산업 특별법’은 위기의 시작점 앞에 서 있다. 이 법이 단순히 생산을 덜어주는 법이 될 것인지, 아니면 산업 전환의 구조를 그리는 법이 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위기의 본질이 복합적이라면, 해법도 단선적이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건 특별한 법이 아니라, 특별한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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