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심장이었던 제조업이 존폐 기로에 섰다. 제조기업 10곳 중 8곳 이상(83.9%, 대한상의 2025)이 "경쟁 우위를 상실했거나 추월당했다"고 자평할 만큼 위기감은 깊다. 인구 절벽에 따른 노동력 부족, 미·중 패권 경쟁발 공급망 불안, 여기에 AI 전환이라는 거대한 파고까지 겹치면서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생존조차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피지컬 AI(Physical AI)'가 제조업의 운명을 가를 게임 체인저로 부상하고 있다. AI가 로봇의 몸을 빌려 현실 세계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몸을 가진 뇌'의 등장은,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의 예측대로 7경 원대 신시장을 창출하며 공장 전체를 거대한 로봇으로 진화시키는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한다. 과연 한국 제조업은 피지컬 AI라는 날개를 달고 추락의 위기에서 벗어나 재도약할 수 있을까.
국회미래연구원(원장 김기식)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피지컬 AI 시대, 제조업 혁신 방안')를 통해 한국 제조업의 냉정한 현주소를 진단하고, 피지컬 AI를 활용한 생존 전략과 7대 정책 해법을 제시했다.
벼랑 끝 韓 제조업… '인력·기술·공급망' 삼중고
보고서가 진단한 한국 제조업 위기의 원인은 복합적이고 구조적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최저 출산율(0.7명)은 생산가능인구 급감(2020년 3천740만 명 → 2050년 2천420만 명 예상)으로 이어져 노동력 부족을 심화시킨다. IMF는 이로 인해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연간 0.67%p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높은 인건비는 베트남 등과의 경쟁에서 밀려 생산기지 해외 이전을 부추긴다(삼성 스마트폰 절반 베트남 생산).
더 심각한 것은 '숙련공의 소멸'이다. 산업화를 이끈 베이비부머 세대의 대거 은퇴가 임박했지만, 청년층은 제조업을 기피한다. 금형·용접 등 뿌리산업은 물론, 이차전지·바이오 등 첨단 분야에서도 숙련 기술 단절이 우려된다. 보고서는 경남의 한 용접업체가 숙련공 부족으로 대규모 거래를 포기한 사례, 조선업 숙련공이 10년 새 절반으로 급감하고 40~50대 비중이 70%에 육박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기술 전승 단절 위험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외부 환경 변화는 위기를 더욱 증폭시킨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은 한국이 의존해 온 '효율성 기반 글로벌 분업 체계'를 '진영 기반 분리된 생산 체계'로 바꾸고 있다. AI, 로봇 등 핵심 기술에서 미국과 중국은 상호 의존성을 끊고 독립 생태계를 구축 중이다. 이는 기술 표준, 인재 교류, R&D 협력까지 가로막으며, '중국 생산 → 선진국 판매' 전략으로 성장한 한국 제조업을 딜레마에 빠뜨렸다(2023년 31년 만의 대중 무역적자 기록).
관세 전쟁과 보호무역주의 강화는 예측 가능한 통상 환경을 붕괴시켰다. 보고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러스트벨트 노동자층 표심과 맞물려 있으며, 해외 생산의 경제적 유인을 제거해 미국 내 제조업 투자를 강제하는 구조적 압박이라고 분석했다. 국내 제조기업 60.3%가 트럼프 관세 정책 영향권 아래 있지만, 현지 생산 등 근본적 대응에 나선 기업은 3.9%에 불과하다(대한상의, 2025).
코로나19 이후 가속화된 공급망 재편 역시 부담이다. 각국이 디리스킹(de-risking), 리쇼어링(reshoring),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을 내세우며 자국 중심 공급망 구축에 나서면서, 해외 기업의 역내 생산을 강제하는 추세다. 하지만 한국의 리쇼어링 실적은 초라하다. 지난 5년간 국내 복귀 기업은 연평균 20여 곳(대기업 4곳)에 불과했다(산자부, 2024). 보고서는 "지원금 확대만으로는 높은 인건비, 제한적 산업용지, 까다로운 규제 등 근본적 약점을 상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한국 제조업은 AI 전환이라는 구조적 변화에 직면했다. 이는 제품, 생산 방식, 가치 사슬, 경쟁 요소가 동시에 재편되는 혁명으로,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피지컬 AI, '몸을 가진 뇌'가 제조를 뒤바꾼다
보고서는 피지컬 AI를 위기 돌파의 핵심 열쇠로 주목한다. 피지컬 AI는 단순히 똑똑한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물리 법칙, 마찰, 인과관계 등 현실 세계를 이해하고, 센서로 감지(Perception)하고, AI로 판단(Planning)하며, 로봇 팔다리(Actuation)로 실제 행동하는 '몸을 가진 뇌(Brain in a Body)'다. 기존 챗GPT 같은 '병 속의 뇌(Brain in a Jar)'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몸을 가진 뇌'는 제조 패러다임을 뿌리부터 바꾸고 있다.
정해진 프로그램만 따르던 로봇은 변화하는 환경에 스스로 적응하고 자율적으로 판단하며 작업하는 '생산 파트너'로 진화한다. 인간 주도의 공정 설계는 AI가 실시간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화를 주도하는 'AI 주도 의사결정'으로 전환된다. 24시간 무인 가동, 오류율 감소, 에너지 효율 개선 등 경제적 효과는 물론, 디지털 트윈과 결합해 개발 기간 단축과 대량 맞춤생산(Mass Customization)까지 가능케 한다. 보고서는 샤오미의 '다크 팩토리', 화낙의 '로봇이 로봇 만드는 공장' 등을 통해 피지컬 AI가 이미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로봇 밀도 1위 한국, 왜 'AI 활용 0.1%'인가?…7대 해법 제시
한국은 피지컬 AI 시대에 분명한 강점을 갖고 있다. 로봇 밀도 세계 1위(근로자 1만 명당 1천12대, 세계 평균 7배)는 로봇 기술 확산 기반이 탄탄함을 보여준다. 수십 년간 축적된 방대한 제조 데이터 역시 AI 학습의 핵심 자원으로서 차별화된 경쟁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보고서는 한국의 현실이 '속 빈 강정'에 가깝다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로봇 활용이 대기업 수요 중심으로 치우쳐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공급 기업 생태계가 취약하다. 핵심 부품(감속기, 서보모터 등)의 해외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감속기(일본 의존도 70%), 서보모터·제어기(일본·중국 의존도 50% 이상) 등 핵심 부품 국산화율은 30~40%대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데이터 활용 능력 부족'이다. 중소·중견기업 60.8%가 제조 데이터를 수집하지만, 이를 분석해 AI를 도입한 기업은 고작 0.1%에 불과하다(중기부, 2025). 데이터가 잠자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회미래연구원은 한국 제조업이 피지컬 AI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7가지 정책 방향을 제안했다.
먼저, AI·가상융합·로봇 등 분절된 정책을 통합 관리하는 범부처 컨트롤타워 구축과 통합 전략 로드맵 수립을 강조했다. R&D는 촉각 센서, 고밀도 배터리 등 우리가 강점을 가질 수 있는 핵심 난제 영역에 '선택과 집중'해야 한다고 봤다.
로봇·설비 간 호환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방형 제조 OS 및 제조 특화 대형 기계 모델(LMM) 개발 지원도 제안했다.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 효과를 내기 위해 인력 부족, 작업 위험도 등을 고려한 도입 분야의 전략적 우선순위 설정 필요성도 지적했다.
로봇 학습 데이터 확보 경쟁에 대응하기 위한 통합 훈련 실증 센터 구축, 숙련공 경험 데이터화 지원, 고정밀 지도 등 전략 데이터 관리 강화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재난, 치안, 농업 등 공공 부문에 선제적으로 피지컬 AI를 도입해 초기 시장을 창출하고 공공 서비스 혁신을 견인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기술 발전 속도에 맞춰 데이터 보안, 인간-로봇 협업 안전 기준 마련 등 예상되는 위험에 대한 제도적 보완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피지컬 AI가 한국 제조업의 '생존 전략'임을 거듭 강조하며, 로봇 인프라 위에 데이터 활용 능력을 키우고, 핵심 기술 자립과 생태계 조성이 시급하다고 결론 내렸다. 정부의 전략적 지원과 산업계의 혁신 노력이 결합될 때, 한국 제조업이 피지컬 AI라는 파도를 타고 위기를 넘어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서는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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