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위기는 항상 공급망의 가장 약한 고리를 먼저 타격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5월 15~31일 원부자재를 수급하는 중소기업 41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동 정세 불안이 장기화하면서 국내 제조 생태계의 기저를 이루는 중소기업들이 버티기 어려운 국면으로 몰리고 있다. 표면적인 원인은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과 물량 부족이지만, 사태 이면에는 위기 비용을 하청업체에 전가하는 구조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한 달 앞도 못 보는 재고의 위기
이번 설문 결과는 산업 현장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응답 기업의 71.9%가 올해 2월 말 대비 주요 원부자재 매입 단가가 20% 이상 상승했다고 답했다. 특히 포장재·필름·종이 사용 기업군에서는 “주요 원부자재 매입단가가 80% 이상 폭등했다”는 응답이 31.4%에 달해, 전체 평균(15.1%)의 두 배를 웃도는 수준의 원가 압박이 확인됐다.
가격 수준의 변화도 거칠다. 현장 인터뷰에 참여한 필름·포장재 제조기업 A사는 선형저밀도폴리에틸렌(LLDPE)을 포함한 일부 핵심 원료 가격이 톤당 150만 원에서 280만 원 수준으로 뛰었다고 호소했다. 이는 특정 원료군에 한정된 사례이지만, 중동발 공급망 변화가 단순한 ‘두 자릿수 인상’이 아니라 일부 품목에서는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급등으로 체감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버틸 체력도 충분하지 않다. 평상시 적정 재고 수준을 100으로 봤을 때, 현재 재고가 70% 미만이라고 답한 기업이 65.9%에 달했다. 남은 재고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이 “1개월 미만”이라는 응답도 36.1%였다. 사태가 3개월 이상 이어질 경우 조업 축소를 검토하겠다는 기업이 39.8%에 이르렀고, 장기화 대응 계획을 별도로 세우지 못했다는 기업이 전체의 49.7%로 조사됐다. 숫자만 놓고 보면, ‘3개월 이상 이어지면 버티기 어렵다’는 인식이 현장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의미다.
일방적 통보가 키운 시장 실패
이 수치들은 단순히 외부 변수에 의한 불가항력적 결과로만 보기도 어렵다. 설문 이후 진행된 중소기업중앙회 현장 인터뷰(FGI)에서는 대기업 공급사들의 일방적인 가격 인상 통보와 물량 제한이 위기를 증폭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지목됐다. 구체적인 가격 산정 기준이나 사전 협의 없이 비용 상승분이 하위 단계로 전가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자본력이 부족한 영세 기업들은 원료 확보 경쟁에서 밀려나고, 결국 생산 차질 우려까지 떠안게 된다. 포장재와 플라스틱 같은 기초 소재의 공급 차질은 곧바로 식품·생활용품 등 전방 산업의 생산 차질로 확산될 수 있다. 중동발 변수라는 외부 충격 위에, 과점적 지위를 가진 원료 공급사가 시장의 완충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고 이익 보전에 더 무게를 둘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시장 실패의 양상이다.
고통 분담을 위한 제도적 개입 필요
정부의 대응은 단기적인 자금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번 설문에서 중소기업들은 원부자재 수급 안정을 위해 정부가 우선 추진해야 할 정책으로 ‘원부자재 가격 및 공급상황 모니터링 강화’(30.0%)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납품단가 조정 및 납품대금 연동제 활용 지원’(23.7%), ‘대체 원부자재·수입처 발굴 지원’(17.3%), ‘긴급경영안정자금 지원’(12.4%) 순으로 나타났다.
이를 감안하면, 산업통상부와 관계 부처는 원부자재 가격·공급 상황에 대한 모니터링 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대기업 원료사와 대리점의 가격 결정 과정이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선행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원료사에 대한 정책·금융 지원이 실제로 중소기업 공급 안정으로 이어지는지까지 추적하는 ‘사후 모니터링’도 필요하다.
나아가 납품단가 연동제가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원자재 가격 상승분이 납품 단가에 공정하게 반영되는 구조가 정착되지 않으면, 외부 충격이 발생할 때마다 중소기업의 연쇄 도산 위험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공급망의 안정성은 생태계 구성원 간의 합리적인 고통 분담에서 시작된다. 이번 중동발 공급망 이상은 일시적인 변수가 아니라, 원료 과점 구조와 비용 전가 관행을 손보지 않으면 어떤 지정학 리스크든 비슷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경고에 가깝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를 빌미로 한 비용 전가가 아니라, 이 구조를 바로잡는 제도적 개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