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품을 마친 뒤에도 중소기업의 자금 사정은 끝나지 않는다. 원재료값과 인건비, 물류비는 이미 나갔지만 거래처에서 대금이 들어오는 날은 뒤로 밀린다. 물건은 공장을 떠났는데 현금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 중소기업은 대출과 외상매출채권으로 그 간극을 버틴다.
현행 상생협력법과 하도급법은 납품대금을 물품 수령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지급하도록 정한다. 법정 기한 안에 지급하는 거래는 많다. 그러나 중소기업 현장에서는 ‘60일 이내’와 ‘적기에 받는 것’ 사이에 여전히 큰 차이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서 수탁기업과 위탁기업 모두 적정 지급기한으로 가장 많이 꼽은 기간은 30일이었다.
60일 안에 받지만, 30일 안에는 절반
중소기업중앙회가 수·위탁거래가 있는 중소기업 500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해 23일 발표한 ‘납품대금 지급기한 단축 관련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수탁기업의 53.7%는 납품대금을 30일 이내에 받았다. 위탁기업 중 30일 안에 대금을 지급했다는 응답은 62.6%였다.
법정 기한인 60일 이내로 범위를 넓히면 비율은 크게 오른다. 수탁기업의 97.3%가 60일 안에 대금을 수령했다고 답했고, 위탁기업의 99.4%는 같은 기간 안에 지급했다고 응답했다.
겉으로 보면 법정 기한 준수율은 높다. 그러나 납품 이후 30일이 지나도 대금을 받지 못하는 수탁기업이 절반에 가까운 현실은 자금 여력이 작은 기업일수록 부담이 될 수 있다. 생산을 지속하려면 납품대금이 들어오기 전에도 원재료를 사고 임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체감하는 적정 지급기한은 현행 60일보다 짧았다. 조사 대상 기업의 60.6%는 법정 납품대금 지급기한으로 30일이 적정하다고 답했다. 이어 15일 18.0%, 45일 9.4%, 40일 4.0%, 50일 3.4% 순이었다.
“30일 단축, 유동성에 숨통”
수탁기업의 71.0%는 법정 지급기한을 현행 60일보다 줄일 경우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보통’이라는 응답은 19.2%였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응답은 9.8%에 그쳤다.
기한 단축이 도움이 된다고 답한 수탁기업이 가장 많이 꼽은 기대효과는 자금 유동성 개선으로 55.3%였다. 이어 거래처 대금의 원활한 지급 40.9%, 대출이자와 수수료 등 금융비용 절감 1.8% 순으로 조사됐다.
이는 납품대금 지급기한이 단순한 결제 조건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다음 생산을 결정하는 자금줄이라는 뜻이다. 대금 회수가 빨라지면 원재료 매입과 임금 지급, 협력사 결제로 이어지는 자금 순환도 빨라진다. 반대로 결제 기간이 길어지면 납품을 늘려도 현금 부족이 심화될 수 있다.
위탁기업에도 ‘시차’ 부담
지급기한 단축이 수탁기업에만 마냥 쉬운 해법은 아니다. 위탁기업을 대상으로 법정 지급기한이 줄어들 경우의 부담을 물은 결과 ‘보통’이라는 응답이 41.6%로 가장 많았다. ‘어렵지 않다’는 응답은 32.7%, ‘어렵다’는 응답은 25.7%였다.
지급이 어렵다고 답한 위탁기업의 74.1%는 운전자금 확보와 단기 유동성 악화를 가장 큰 부담으로 꼽았다. 대금을 먼저 받아야 협력사에 지급할 수 있는 거래 구조에서는 위탁기업도 결제 시차에 묶이기 때문이다.
부담이 예상되는 거래 구조로는 구매·발주기업이 1차 협력사에 지급하는 대금 지급기간이 긴 경우가 39.4%로 가장 높았다. 납품대금 지급기한을 앞당기는 논의가 1차 협력사와 수탁기업 사이에서만 머물러서는 효과가 제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핵심은 지급기한을 줄이는 것과 함께 대기업·원청기업에서 1·2·3차 협력사로 이어지는 자금 흐름을 함께 개선하는 데 있다. 한 단계의 결제 조건만 바뀌고 상위 거래처의 지급 관행이 그대로라면, 현금 부담은 아래 단계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30일 정착 위한 금융 보완책
조사 대상 기업의 46.8%는 지급기한 단축 제도를 유예기간 없이 시행할 수 있다고 답했다. 반면 27.0%는 6개월, 22.8%는 1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제도 도입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지원으로는 운전자금 저리융자와 보증 확대가 58.4%로 가장 많이 꼽혔다. 외상매출채권·어음 등 결제 수단의 만기 단축은 24.0%, 매출채권 팩토링과 보험 등 매출채권 조기 현금화 지원 확대는 16.2%였다.
지급기한을 30일로 앞당기는 일은 거래 질서를 바꾸는 문제이자 금융 환경을 손보는 과제다. 수탁기업에는 납품 뒤 현금화까지의 공백을 줄여주지만, 상위 기업의 결제가 늦는 업종에서는 위탁기업의 단기 자금 부담을 키울 수 있다.
양찬회 중소기업중앙회 전무이사는 “납품대금 지급기일 단축은 중소기업의 유동성을 확충해 자금난을 완화하는 등 기업경영 개선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며 “업종별 거래구조를 고려해 운전자금 저리융자와 보증 확대 등 보완책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납품대금 60일은 법이 허용한 최장선이다. 하지만 중소기업이 바라는 것은 법정 기한을 지켰다는 확인서가 아니라, 다음 주문을 준비할 수 있는 현금이다. 납품 후 30일 안에 대금이 도는 구조가 자리 잡을 때, 생산 현장의 자금 흐름도 비로소 막힘없이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