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배터리 수요는 줄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성장의 방향과 경쟁 방식이다. 전기차용 고성능 삼원계 배터리에 집중해온 한국 기업은 미국 전기차 수요 둔화로 북미 생산설비 활용과 수익성 부담이 커졌다. 반면 중국 업체들은 리튬인산철(LFP)과 에너지저장장치(ESS)를 앞세워 시장의 가격과 제품 기준을 바꾸고 있다.
변화는 전기차 판매 증가세가 둔화한 데 그치지 않는다. 중국 LFP가 배터리 가격의 기준을 낮추고, 미국의 관세·세제·공급망 규제가 시장 진입 조건을 다시 짜고 있다. ESS에서는 셀 성능뿐 아니라 원가와 소재 조달, 전력변환·제어, 화재 안전, 장기 운영 능력까지 평가 대상이 된다.
산업종합저널은 4회에 걸쳐 ESS가 배터리 산업의 새 성장축으로 떠오른 배경과 중국 LFP가 만든 원가 격차, 미국 정책의 효과와 한계, 전력 시스템으로 확대된 경쟁 구도를 살펴본다. 첫 편에서는 세계 배터리 시장이 성장하는데도 한국 기업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를 수요 지역과 제품 변화에서 짚는다.
![[ESS로 옮겨간 배터리 전쟁①] 배터리는 성장하는데 K-배터리는 왜 흔들리나 - 산업종합저널 에너지](http://pimg3.daara.co.kr/kidd/photo/2026/09/15/thumbs/thumb_520390_1789453528_3.png)
배터리 생산시설에서 작업자들이 자동화 공정을 점검하고 있다. 전기차 중심으로 구축된 생산설비를 ESS용 제품까지 활용하려는 배터리 업계의 전환을 표현했다.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
배터리 수요 둔화 아닌 성장축 이동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5년 세계 전기차 배터리 탑재량은 1.2TWh로 전년보다 약 30% 증가했다. 2020년과 비교하면 7배를 웃돈다. 전기차는 전체 리튬이온 배터리 수요의 70% 이상을 차지했다. 배터리 산업이 꺾였다기보다 늘어난 수요가 특정 지역과 기업에 집중된 것이다.
지역별 흐름은 엇갈렸다. 2025년 중국에서 탑재된 전기차 배터리는 세계 물량의 60%를 차지한 반면 미국 시장은 정체됐다. IEA는 중국계 기업이 공급한 제품이 세계 전기차 배터리 탑재량에서 차지한 비중을 약 75%로 집계했다. 유럽에서도 중국계 기업의 비중이 절반을 넘어섰다.
중국 내 전기차 판매가 늘어난 데다 현지 업체들이 해외 공급을 확대한 결과다. 한국 기업이 집중 투자한 미국에서는 완성차 업체들이 전동화 계획을 조정하면서 배터리 생산설비의 가동과 수익성에 부담을 주고 있다. 세계 수요 증가와 K-배터리의 실적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배경이다.
전기차 시장의 무게중심이 고급차에서 보급형으로 넓어진 점도 배터리 선택을 바꿨다. 제한된 공간에 많은 에너지를 담아야 하는 고성능 전기차에서는 삼원계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중요하다. 가격과 충·방전 수명, 열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보급형 차량과 ESS에서는 LFP 적용이 확대되고 있다.
IEA 집계에서 2025년 LFP 배터리 팩의 kWh당 평균 가격은 니켈·망간·코발트계 배터리보다 40% 이상 낮았다. 개별 제품과 공급계약에 같은 가격차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ESS처럼 에너지 밀도보다 비용과 반복 운전이 중요한 용도의 비중도 가격 격차에 영향을 미쳤다.
ESS, 배터리 수요의 두 번째 축으로 부상
IEA에 따르면 ESS는 2025년 세계 리튬이온 배터리 수요의 15% 이상을 차지했다. 전기차보다 비중은 작지만 세계 배터리 저장용량은 최근 5년간 20배 넘게 증가했다. 재생에너지 발전이 늘고 전력망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한 시간에 공급하는 설비의 역할도 확대됐다.
ESS를 전기차 수요 둔화기에 남는 셀을 판매하는 임시 시장으로 보기는 어렵다. 전기차에서는 차량 가격과 주행거리, 충전속도가 배터리 선택에 영향을 준다. 계통용 ESS는 저장단가와 수명, 가동률, 화재 안전, 유지보수 비용이 사업성을 좌우한다. 사용 환경과 발주 기준이 다른 별도 시장이다.
미국에서는 변화가 설치 실적으로 나타났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계통용 배터리 저장설비의 명목 출력용량은 2025년 말 43.6GW에서 2026년 6월 말 약 52GW로 늘었다. 올해 상반기에만 8.3GW가 가동을 시작했다.
사업자들이 EIA에 제출한 계획에는 올해 하반기 14GW, 2027년 26GW, 2028년 14GW의 추가 설비가 잡혀 있다. 예정 사업이 모두 계획대로 준공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저장장치가 발전소의 부속설비를 넘어 미국 전력망 투자의 한 축으로 들어선 흐름은 확인된다.
여기서 52GW는 배터리에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량을 뜻하는 GWh가 아니다. 특정 시점에 공급할 수 있는 설비의 명목 출력용량이다. 출력 단위인 GW와 저장량 단위인 GWh를 동일한 시장 지표처럼 직접 비교해서는 안 된다.
![[ESS로 옮겨간 배터리 전쟁①] 배터리는 성장하는데 K-배터리는 왜 흔들리나 - 산업종합저널 에너지](http://pimg3.daara.co.kr/kidd/photo/2026/09/15/thumbs/thumb_520390_1789453535_10.png)
계통용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설에서 작업자가 설비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미국의 계통용 배터리 저장설비는 지난 6월 말 명목 출력용량 기준 약 52GW까지 늘었다.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
전기차 생산설비, ESS 수요와 연결
국내 기업들도 전기차에 집중됐던 생산기반을 ESS 수요와 연결하기 시작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8월 미국 미시간주 랜싱 공장에서 생산을 개시했다. 이 공장은 ESS용 LFP 셀과 전기차용 NMC 셀을 함께 생산하는 복합 거점이다.
회사는 미시간·캐나다 공장과 미국 내 합작법인 생산거점을 포함해 2026년 말 북미 LFP 셀 생산능력을 50GWh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목표 생산능력으로, 실제 출하량과 가동률은 수주와 양산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삼성SDI는 스텔란티스와 합작한 미국 인디애나주 스타플러스에너지 공장의 전기차용 생산라인 일부를 ESS용으로 전환하고 있다. 기존 고니켈 NCA 배터리를 생산하는 동시에 2026년 4분기부터 ESS용 LFP 제품을 양산한다는 계획이다. 아직 예정 단계인 만큼 실제 생산 개시 여부는 추후 확인이 필요하다.
생산품목 변경은 유휴설비를 활용하는 단기 대응인 동시에 제품 포트폴리오를 다시 짜는 작업이다. 그러나 전기차 셀을 ESS에 넣는다고 전환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화학계와 셀 규격이 달라지면 소재 조달과 공정 조건, 품질검사 체계를 조정해야 한다. 장기간 반복되는 충·방전과 설치 환경을 반영한 안전·보증 기준도 갖춰야 한다.
셀 제조에서 전력 시스템 경쟁으로
ESS 사업자는 배터리 셀만 평가하지 않는다. 전력변환장치(PCS), 배터리관리시스템(BMS), 에너지관리시스템(EMS)의 연계 성능과 화재 감지·진압 체계, 장기 성능보증, 유지보수 능력까지 살핀다. 셀 제조에 집중됐던 경쟁 범위가 전력 시스템의 안정적인 운영으로 넓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현지 생산과 함께 중국산 소재·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과제도 안고 있다. 미국에 공장이 있더라도 소재와 기술, 기업 지배관계가 세액공제와 공급망 요건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중국 공급망을 활용하면 정책 지원이 제한될 수 있고, 비중국 소재를 서둘러 확보하면 제조원가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K-배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전기차 시장의 반등을 기다리는 데 있지 않다. 이미 달라진 수요에 맞춰 제품과 생산설비, 조달망, 사업 범위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세계 ESS 시장의 가격 기준을 바꾼 중국 LFP와의 원가 격차를 정확히 확인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