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 인공지능(AI)을 도입하는 것과 이를 공급하는 국내 산업을 키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생산설비와 데이터를 연결하고 안전성과 품질을 검증하며, 다른 공장에도 반복 적용할 수 있어야 도입 경험이 공급기업의 기술과 매출로 남는다.
한국 제조업의 인공지능 전환(AX)에서 비어 있는 곳은 AI 모델과 공장 사이의 ‘마지막 1마일’이다. 범용 AI를 개별 공정에 맞게 조정하고 기존 설비와 연결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응하는 영역이다.
정부의 AI 자율제조 사업에서도 이 간극이 드러난다. 산업통상부가 2024년 공개한 26개 선도 프로젝트 가운데 현대자동차는 AI와 로봇을 활용해 생산계획과 물류·생산 경로를 조정하는 다품종 생산체계 구축을 제시했다. 삼성중공업은 선박용 배관의 절단부터 용접까지 자동화하고, 용접 조건을 바꾸는 로봇 시스템을 개발하는 계획을 내놨다.
코오롱은 설비 상태와 품질을 감지·제어하는 기술에 무인 물류를 결합하고, 에코프로는 공정 데이터 분석과 설비 제어를 연계하는 과제를 추진하기로 했다. 각 사업은 AI 모델 하나를 설치하는 작업이 아니라 센서와 생산설비, 로봇, 물류, 품질관리시스템을 함께 연결해야 하는 구조다.
이들 사례는 제조 AX의 병목이 AI 모델의 보유 여부에만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산업부가 당시 제시한 생산성 향상과 결함 감소 등의 수치는 사업 완료 후 확인된 실적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통해 기대한 목표치다. 실제 성과는 구축 이후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참여기관과 예산보다 중요한 ‘재사용’
정부는 제조 AX의 기반을 넓히고 있다. 산업통상부가 2025년 9월 출범시킨 M.AX 얼라이언스는 팩토리와 제조서비스, 유통·물류, 미래차, 로봇, 자율운항선박, 방산, 반도체, 산업단지 AX 등 11개 분과로 운영된다.
산업부 발표에 따르면 참여기관은 출범 당시 약 1000곳에서 같은 해 12월 1300곳으로 늘었다. 정부는 2026년 AI 관련 예산 가운데 7000억원을 얼라이언스 중심으로 집행하고 제조 데이터 공동 활용과 분야별 AI 모델, 온디바이스 AI 반도체, AI 팩토리 수출산업화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1300개 기관과 7000억원은 사업 규모를 보여주지만 국내 공급산업의 성과를 입증하는 숫자는 아니다. 참여기업이 늘어도 실증 기술이 다른 공장으로 확산되지 않거나 국내 전문기업의 후속 계약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공급 역량은 축적되지 않는다.
정책 성과도 AI를 도입한 기업 수와 과제 건수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한 공장에서 검증한 기술의 재사용률과 다른 생산라인으로의 확산, 국내 솔루션 채택 비중, 공급기업의 반복 수주와 유지보수 매출을 함께 봐야 한다.
AI 시스템을 구축한 뒤 데이터와 운용 노하우가 수요기업 내부에만 남거나 특정 해외 플랫폼에 묶이면 국내 공급기업은 일회성 설치업체에 머물 수 있다. 반대로 동일한 기술을 여러 공장에 적용하고 장애 대응과 성능 개선까지 맡는다면 실증은 공급산업의 기반이 된다.
공장마다 다시 시작되는 데이터 연결
범용 AI는 언어와 이미지, 코드를 처리할 수 있지만 개별 공장의 설비 구성과 작업 순서, 품질 기준까지 알고 있지는 않다. 같은 업종에서도 사용 중인 센서와 제어장치, 생산관리시스템이 다르면 데이터를 다시 정리하고 연결해야 한다.
산업연구원(KIET)은 ‘글로벌 AI 풀스택 경쟁과 우리나라의 대응: AX 확산을 넘어 공급 역량으로’ 보고서에서 한국이 AI를 먼저 도입한 뒤 데이터와 통신·컴퓨팅 기반을 보완하는 경로를 밟았다고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 전처리에 전체 개발 시간의 70∼80%가 소요되는 문제를 제시했다.
전처리는 자료 형식만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생산설비에서 수집한 값 가운데 오류와 누락을 걸러내고 장비별 시간과 측정단위를 맞추며, 작업 조건과 품질 결과를 연결하는 과정이다.
공장마다 이 작업을 처음부터 반복하면 실증사업이 늘어도 구축 비용과 기간은 줄지 않는다. 공급기업도 한 번 개발한 기술을 다른 사업장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워진다.
설비 제어에는 클라우드 AI와 다른 조건도 요구된다. 생산라인은 짧은 시간 안에 반응해야 하고 반도체·방산처럼 외부망 연결이 제한되는 공정도 있다. 현장에서 데이터를 처리하는 엣지 컴퓨팅과 폐쇄망 AI, 운영기술(OT) 보안이 필요한 이유다.
‘마지막 1마일’을 운영 표준으로
공장별로 반복되는 연결 작업을 줄이려면 AI가 현장에서 작동하는 규칙을 정리해야 한다. 산업연구원이 한국의 경쟁 영역으로 제시한 ‘운영 표준’이다.
운영 표준에는 공정 이상 판정 기준과 설비 간 자율 협조 방식, 안전·품질 임계값 등이 포함된다. AI가 어떤 조건에서 설비를 멈추거나 조정할지, 어느 단계까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언제 작업자에게 결정을 넘길지를 정하는 규칙이다.
운영 기준이 기업과 공장마다 완전히 다르면 공급기업은 사업장별로 시스템을 다시 개발해야 한다. 반대로 업종별 공통 데이터 구조와 제어 원칙, 참조모델을 마련하면 한 공장에서 검증한 기술을 다른 생산라인과 협력사로 확산하기 쉬워진다.
표준화가 모든 공장을 같은 방식으로 운영한다는 뜻은 아니다. 공통 인터페이스와 안전 원칙을 마련하고 각 기업이 공정 조건에 맞는 기준을 추가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방식이다.
역할 분담도 필요하다. 대기업은 공정과 검증 환경을 제공하고 전문기업은 AI 모델과 센서, 엣지 장비, 제어·통합 기술을 공급할 수 있다. 시험·인증기관은 성능과 안전성을 확인하고 정부는 서로 다른 기업의 기술이 연결될 공통 기반을 마련하는 구조다.
실증 과정에서 발생한 데이터와 기술의 소유권도 정해야 한다. 성과가 수요 대기업에만 귀속되면 참여한 전문기업이 다른 공장이나 해외시장에 같은 기술을 공급하기 어렵다. 사업 착수 단계부터 데이터 사용 범위와 지식재산권, 후속 사업화 권한을 계약으로 구분해야 한다.
HBM과 공장 사이의 공급 계층
한국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제조설비, 시스템통합 역량을 갖고 있다. 그러나 HBM은 AI 가치사슬에서 반도체 계층을 구성하는 핵심 부품이지 전체 생태계를 통합하는 플랫폼은 아니다.
글로벌 기업들은 칩과 개발도구, 클라우드, 모델, 응용 서비스를 묶고 있다. 엔비디아는 GPU와 CUDA를 기반으로 디지털트윈과 합성데이터, 로봇 학습·검증 환경까지 연결한다. 구글·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는 자체 칩과 클라우드, AI 모델을 결합하고 있다.
이 구조에서는 어떤 개발환경과 데이터 형식을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 제조기업이 특정 플랫폼에 맞춰 시스템을 구축하면 다른 생태계로 옮길 때 비용과 시간이 커지는 락인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기술의 국적 자체보다 도입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와 개발 경험이 국내 공급기업의 자산으로 남는지다. 외국 AI 모델을 사용하더라도 국내 기업이 설비 연결과 엣지 처리, 안전·품질 검증, 유지보수를 맡아 다른 공장에 다시 공급할 수 있다면 자체 역량을 축적할 수 있다.
반대로 국내 반도체가 사용되더라도 현장 소프트웨어와 운영 규칙, 고객 접점을 해외 플랫폼이 통제하면 가치 배분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어렵다. HBM과 실제 공장 사이에 존재하는 공급 계층을 누가 맡느냐가 제조 AX 산업화의 관건이다.
유럽은 데이터 교환 기반부터 구축
유럽의 산업 데이터 전략은 기업 간 데이터 교환 기반을 먼저 구축한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자동차산업 데이터 생태계인 카테나-X는 완성차업체와 부품사, 중소기업이 데이터 통제권을 유지하면서 표준화된 방식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체계를 지향한다.
카테나-X는 상호운용을 위한 공통 표준과 인증, 계약 구조를 마련하고 있다. 데이터 제공 기업이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정보를 제공할지 결정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중앙 플랫폼에 모든 정보를 모으는 구조와는 다르다.
한국이 이 체계를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다만 AI 실증에 앞서 데이터 접근권한과 교환 방식, 보안, 계약, 책임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은 공통 과제다.
제조 데이터는 영업비밀과 공정 경쟁력을 담고 있어 기업이 외부 공유를 꺼릴 수밖에 없다. 데이터 공동 활용을 추진하려면 공유 범위와 사용 목적, 성과 배분, 유출 책임을 먼저 구체화해야 한다.
도입 실적에서 공급기업의 반복 수주로
제조 AX 정책은 도입 기업 수와 실증 건수뿐 아니라 기술이 산업에 남았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국산 솔루션 사용 비중과 후속 계약, 다른 생산라인으로의 확산, 데이터·소프트웨어 재사용률, 장애 대응시간 등이 지표가 될 수 있다.
국내 공급기업의 매출과 수출, 반복 수주, 유지보수 인력 증가도 함께 확인해야 한다. 한 번의 구축비를 받는 사업에서 벗어나 성능 개선과 운영 서비스를 지속해서 제공해야 공급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 보고서는 제조 AX 공급 기반과 운영 표준의 필요성을 제시했지만 국내 기술 자립도와 해외 플랫폼 의존율, 필요한 투자 규모를 정량화하지는 않았다. 정부가 정책으로 구체화하려면 업종별 공급기업과 기술 수준, 실증 이후 계약 실적을 추가로 공개할 필요가 있다.
제조 AX 경쟁의 핵심은 AI를 얼마나 많이 도입했느냐가 아니다. 한 공장에서 해결한 문제를 다른 공장에서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기술과 데이터, 운영 규칙으로 남겼느냐에 있다. 범용 AI를 사오는 나라에 머물 것인지, 그 AI가 공장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설계하고 공급하는 나라가 될 것인지가 다음 승부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