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컬 AI(Physical AI)의 상용화 무대로 제조현장이 부상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적인 제조 기반을 갖췄지만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행동 데이터를 우리 로봇에 축적하고 산업의 공통 규칙이 될 국제표준까지 연결할 수 있느냐가 과제로 떠올랐다.
산업연구원(KIET)은 제조 특화 AI 행동학습과 자체 로봇의 중요성을 짚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국제표준화 무대에서 제조 응용 분야의 주도권 확보에 나섰다. 제조현장에서 쌓이는 행동 데이터를 우리 로봇에 남기고 그 경험을 국제표준 논의까지 연결하는 것, 두 기관의 진단이 만나는 지점이다.
공장, 피지컬 AI 첫 상용 무대
KIET는 피지컬 AI가 가사·돌봄 등 서비스 영역보다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상대적으로 적은 제조현장에서 먼저 상용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서비스 영역은 고도의 비정형 상황을 학습해야 하는 반면, 제조현장은 학습과 상용화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판단이다.
KIET가 Markets and Markets 자료를 인용해 제시한 전망에 따르면 산업 자동화 부문 피지컬 AI 세계시장은 2025년 9,500만달러에서 2032년 18억8,870만달러로 연평균 약 53% 성장할 전망이다.
피규어 AI(Figure AI)의 휴머노이드 ‘피규어 03(Figure 03)’은 가사 작업이 아직 연구소 내 훈련 단계이지만, 제조 부문에서는 BMW 공장에서 현장 실증이 진행 중이다. 제조현장이 피지컬 AI의 첫 상용화 무대로 꼽히는 배경이다.
고정설비 넘어 로봇이 일한다
지금까지의 제조 AX(AI 전환)는 공장 내 고정설비에 AI를 적용하는 형태에 머물렀다. 생산관리시스템 등 운영기술(OT) 솔루션에 AI를 접목하고 디지털 트윈, 설비 예지보전 등으로 영역을 넓히는 방식이었다.
KIET는 고난도 비정형 업무에는 여전히 사람이 필요하고, 뿌리산업을 포함한 중소 제조기업이 운영하는 구형·레거시 설비에는 AI 적용이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휴머노이드 등 AI 로봇이 인간 행동을 모방 학습해 기존 작업 환경을 유지한 채 인간 업무를 대체할 수 있고, 레거시 설비도 로봇이 직접 조작하는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봤다. 고정설비 기반 제조 AX의 한계를 넘어설 대안이라는 진단이다.
현장 데이터, 누구 로봇으로 남길까
피지컬 AI는 AI 모델의 입·출력에 물리적 환경 인식과 행동이 포함된다. 하드웨어 설계와 AI 모델 개발이 상호 종속적이며, 문서·영상 같은 디지털 데이터가 아니라 물리적 행동 데이터로 학습해야 한다.
문제는 행동 학습 데이터가 특정 폼팩터에 묶인다는 점이다. 한국은 광범위한 제조업 인프라를 보유해 제조 특화 AI 행동학습·데이터 생산에서 비교우위를 지녔지만, 자체 로봇이 없으면 그 부가가치를 내재화하기 어렵다.
이준영 부연구위원은 “로봇의 행동 학습 데이터는 특정 폼팩터에 묶이기 때문에, 우리 로봇 없이 제조현장만 내어주면 우수한 우리 제조 인프라가 글로벌 피지컬 AI 기업의 테스트베드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조에서 쌓은 경험, 국제표준으로
ETRI는 공적 국제표준화기구 가운데 처음으로 피지컬 AI 분야를 전담하는 국제전기통신연합 전기통신표준화부문(ITU-T) ‘체화 AI 포커스그룹(FG-EAI)’ 신설을 주도했다. 체화 AI는 현실 세계에서 로봇 등 물리적 장치가 스스로 상황을 인식·판단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인공지능 기술로, 산업계에서 널리 쓰이는 피지컬 AI와 개념적으로 유사하거나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ETRI는 피지컬 AI의 기본 개념과 구조를 다루는 WG1 ‘기반구조 및 용어’ 의장과 제조·모빌리티·의료 등 실제 산업 적용을 담당하는 WG6 ‘버티컬 산업응용’ 의장을 동시에 맡았다.
특히 ETRI는 ‘제조환경의 멀티모달 미디어 기반 체화 AI 유스케이스 및 요구사항’을 표준화 과제로 제안해 승인받았다. 카메라 영상과 작업자의 음성, 로봇의 위치, 온도·압력 등 다양한 정보를 AI가 함께 이해하고 활용하는 제조현장 피지컬 AI 활용사례와 기술 요구사항을 다룬다.
ETRI는 이런 실제 산업환경의 활용사례와 기술 요구사항을 국제표준화 논의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KIET가 강조한 제조현장의 데이터 경쟁력과 ETRI가 추진하는 제조 분야 국제표준화가 맞닿는 대목이다.
차기 FG-EAI 회의는 10월 13일부터 16일까지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다. ETRI는 국내 산업계와 연구계의 기술·요구사항을 국제표준화 논의에 반영하고 피지컬 AI 분야 글로벌 표준 주도권 확보에 나설 계획이다.
행동 데이터·자체 로봇·국제표준
KIET는 단기적으로는 제조 특화 행동학습을 중심으로 글로벌 기업과 협력해 생태계 교두보를 확보하고, 중장기적으로는 내재화 가능한 부문을 육성해 공급망 안정과 부가가치 고도화를 도모하는 ‘K-피지컬 AI 생태계 확장 전략’을 제안했다.
KIET는 로봇 제조 원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액추에이터와 로봇손은 정부 연구개발 지원이 뒷받침되면 빠르게 글로벌 선도기업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봤다. 온-디바이스 AI 반도체는 엔비디아 등 선도기업과의 협력과 장기적 관점의 연구개발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산업단지 단위 AI 로봇 학습 인프라를 구축해 자체 도입이 어려운 중소·중견기업의 제조 AX를 지원해야 한다는 방안도 제시됐다.
이준영 부연구위원은 “민간 중심의 강력한 피지컬 AI 생태계를 지닌 미국과 달리 중국은 국가 주도 전략으로 미국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맡아 우수한 제조 인프라를 우리 로봇으로 학습시키는 선순환을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지컬 AI 시대의 공장은 제품만 만드는 곳이 아니다. 로봇이 일을 배우는 데이터가 생산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국 제조현장에서 만들어지는 경험을 우리 로봇에 얼마나 축적하고 국제표준 논의까지 끌고 갈 수 있느냐가 한국 피지컬 AI 생태계의 과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