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엑스와 킨텍스 전시장을 자주 다니다 보면 익숙한 풍경이 하나 있다.
부스 앞에 놓인 볼펜을 집어 들고, 다음 부스에서는 캔디와 기념품을 챙긴다. 어느새 쇼핑백 안에는 여러 회사의 로고가 찍힌 물건이 쌓인다. 제품을 묻거나 상담을 요청하기보다 무엇을 나눠주는지부터 살피는 관람객도 더러 눈에 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봤다. 기업도 홍보하려고 가져온 물건이고, 가져가라고 놓은 볼펜 하나쯤이야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전시장을 오래 취재하다 보면 선이 조금씩 흐려지는 장면을 보게 된다.
![[산업톺아보기] “볼펜 하나만요”…전시회 부스가 ‘무료 물품 창구’가 될 때 - 산업종합저널 부품](http://pimg3.daara.co.kr/kidd/photo/2026/09/30/thumbs/thumb_520390_1790738957_85.jpg)
한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여러 개의 쇼핑백을 든 채 이동하고 있다. 전시회에서는 참가기업들이 홍보와 상담 등을 위해 다양한 기념품과 증정품을 제공한다.
부스 한쪽에 둔 간식을 집어 들고는 직원들이 먹는 것인지 묻기도 전에 가져가도 되느냐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명함을 내거나 이벤트에 참여해야 받을 수 있는 물품을 그냥 달라고 요구한다. 거절하면 이유를 따지고, 전시를 위해 가져온 샘플까지 줄 수 없느냐는 말도 나온다.
혼잡한 부스에서 주변을 살피며 물품을 챙기는 모습도 여러 번 봤다. 왜 가져가는지 물으면 별다른 답 없이 자리를 뜨거나, 질문 자체를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볼펜 하나쯤에서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부스 운영자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공짜니까 하나쯤’과 부스 운영 사이
전시회에서 기념품은 낯선 물건이 아니다.
기업들은 상담을 유도하거나 브랜드를 기억시키기 위해 볼펜과 메모지, 간식 같은 증정품을 준비한다. 명함을 받거나 설문에 참여한 관람객에게 주기도 하고, 제품 설명이나 상담을 마친 뒤 건네기도 한다.
무료라는 말이 누구나 원하는 만큼 가져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부스마다 준비한 수량과 용도가 다르다. 상담 고객에게 주려고 준비한 물품이 일찍 소진되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남아 있지 않는다.
전시 샘플은 성격이 다를 수 있다. 제품을 보여주거나 성능을 설명하기 위한 전시물이라면 기념품처럼 배포하려고 가져온 물건이 아니다.
직원용 간식 역시 마찬가지다.
관람객에게 나눠주는 물품과 부스 운영을 위해 준비한 비품은 애초 목적부터 다르다.
볼펜보다 비싼 직원의 시간
몇백 원짜리 볼펜 한 자루만 놓고 보면 기업의 손실은 크지 않아 보인다.
기업의 부담은 물건값만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부스를 만들고 제품을 운반한 뒤 며칠 동안 직원이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잠재 고객을 만나고, 기술을 설명하고, 상담을 거래 가능성으로 이어 가기 위해서다.
그 시간에 반복적으로 증정품을 요구받으면 상담과 부스 운영의 흐름이 끊긴다.
한 사람에게는 배포 기준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샘플을 줄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미 소진된 기념품을 찾는 관람객에게는 같은 답을 되풀이해야 한다.
산업전시회에서는 상담 한 건에 적지 않은 시간이 들기도 한다.
기계와 부품, 자동화 장비, 소재, 에너지 설비는 사양과 적용 조건을 설명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한정된 인력이 본래 목적과 무관한 응대에 묶이면 부스 운영의 효율도 떨어질 수 있다.
물건값보다 응대 비용이 커지는 순간이다.
전시장을 찾는 또 다른 이유
현장에서는 상담보다 물품을 챙기는 데 더 관심을 보이는 관람객의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다만 이를 특정 연령층의 문제로 단정할 근거는 없다. 반복되는 현장 관찰만으로 어느 세대가 더 많이 이런 행동을 하는지 말할 수도 없다.
제품 구매나 상담 목적이 아니더라도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은 있을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을 구경하고 시간을 보내는 공간으로 전시회를 이용하는 것 역시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전시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고,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접할 기회도 넓을수록 좋다.
다만 ‘관람할 자유’와 ‘기업이 준비한 물품을 요구할 권리’는 같은 말이 아니다.
그 선이 흐려지면 불편은 결국 현장 직원에게 돌아간다.
필요한 것은 더 분명한 배포 기준
전시장을 돌다 보면 기업마다 대응 방식이 제각각이다.
어떤 부스는 물품을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두고, 어떤 곳은 상담을 마친 뒤 건넨다. 이벤트 참여자에게만 주는 곳도 있다.
기준이 분명하면 직원도 설명하기 쉽고 관람객도 받아들이기 쉽다.
반대로 기념품과 샘플, 직원 비품이 한데 놓여 있으면 갈등은 개인의 판단으로 넘어간다.
“이건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짧은 말을 왜 해야 하는지 매번 직원이 설명해야 한다.
증정품에는 배포 조건을, 샘플에는 전시용이라는 표시를, 직원 비품에는 비배포임을 명확히 하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실랑이를 줄일 수 있다.
전시회의 목적은 기업이 얼마나 많은 물건을 나눠주는지에 있지 않다.
기술을 보여주고, 사람을 만나고, 상담을 만들고, 거래 가능성을 찾는 곳이다.
취재를 마치고 전시장을 나설 때면 가끔 기계보다 볼펜이 먼저 떠오르는 날이 있다.
볼펜 하나는 작다.
하지만 전시회가 볼펜을 챙기는 곳으로 기억되기 시작하면, 기업이 전시회에서 기대했던 만남의 의미도 함께 작아진다.